협상 타결에 급급했던 한국, 청구권자서 원조 수혜국으로 전락

입력
2015.04.06 17:19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서울에서 스기 미치스케(杉道助) 제6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를 맞이하고 있다. 스기는 정한론(征韓論)의 원조로 통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조카 아들로 일본 관서지역 재계의 거물이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서울에서 스기 미치스케(杉道助) 제6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를 맞이하고 있다. 스기는 정한론(征韓論)의 원조로 통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조카 아들로 일본 관서지역 재계의 거물이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서로 먼저 숫자를 내놓으라며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각자 종이에 숫자를 적어 하나, 둘, 셋 하고 외친 후 동시에 까기로 했다. 우리(일본 측)는 직전까지 분명히 1억달러를 염두에 뒀지만 숫자를 조금 속이자는 생각에 7,000만달러를 적어 냈다. 그런데 한국 측은 딱 10배인 7억달러가 적힌 종이를 흔들어댔다.”

1961년 3월 17일 최덕신 외무부장관과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郞) 일본 외상 간의 청구권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자 실무자인 문철순 외무부 정무국장과 이세키 유지로(伊關祐二郞)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일본 외무성의 별실에서 이처럼 경매시장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연출하며 각각 상대 측의 속내를 타진했다. 명확한 법적 근거를 토대로 하나하나 사실관계를 따져 살펴본 후에야 도출될 수 있는 대일 청구권이 어느덧 정치적 ‘숫자놀음’으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상은커녕 청구권의 의미조차 희미해지면서 당초 청구권자였던 한국의 입장은 점점 왜소해진 반면, 피청구권자였던 일본 측은 이제 원조 제공국으로서 마치 은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로 협상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 직후인 1961년 7월 책정한 대일 청구권 목표액. 이 가운데 군사정부는 제3안인 5억달러를 “절대 청구액수”라며 어떻게든 관철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출처 외교사료관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 직후인 1961년 7월 책정한 대일 청구권 목표액. 이 가운데 군사정부는 제3안인 5억달러를 “절대 청구액수”라며 어떻게든 관철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출처 외교사료관

● 박정희 정권 애초 ‘청구권’ 5억달러 목표

그렇다고 박정희 정권이 처음부터 대일 청구권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반공과 함께 경제재건을 혁명공약으로 표방한 만큼,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직후인 1961년 7월 세 가지 대일 교섭방안을 마련해 청구권 자금 확보에 나섰다. 제1안은 배상적 성격을 배제한 채무 변제로서 19억3,000만달러를, 제2안은 일본 측이 한국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한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는 이른바 ‘미국 해석’을 감안해 제1안 가운데 법적 근거 및 숫자 증빙이 미약한 것을 제외한 항목을 모아 12억1,000만달러를, 그리고 여기에 추가적으로 객관적인 타당성이 있는 청구권만을 걸러내 정치적인 고려까지 가미한 5억달러를 제3안으로 삼았다. 특히 제3안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모든 항목이 사법상 근거를 갖고 있으므로 정치적인 흥정으로 해결해서는 안 되는 절대 청구액수”라면서 어떻게든 관철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물론 이 같은 청구권 구상은 박정희 정권의 발명품이 아니라 역대 정권의 교섭 방침을 계승한 것이었다. 제1안은 이승만 정권이 ‘대일배상요구조서’를 토대로 상정한 24억~19억달러에 근접한 액수로 청구 내용도 대체로 일치했다. 박정희 정권이 최종 목표로 삼은 제3안의 5억달러도 장면 정권이 제5차 한일회담에서 상정한 대일 청구권의 목표액이었다. 앞서 장면 정권은 특히 일본이 필리핀에 배상 명목으로 지급키로 한 8억달러(순배상액 5억5,000만달러, 경제지원 2억5,000만달러) 보다는 많이 받아내겠다는 방침 하에 ‘청구권 5억달러+경제지원 3억달러’ 등 총액 8억달러를 최저 목표액으로 삼았다. 요컨대 청구권 액수의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은 장면 정권의 구상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셈이다.

다만, 이승만 및 장면 정권의 경우 어디까지나 법적 근거와 사실관계를 따져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청구권을 받아내겠다는 입장을 견지한 반면, 박정희 정권은 하루라도 빨리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속전속결, 일괄 타결하겠다는 욕구가 매우 강했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1961년 8월 말 김유택 경제기획원장을 일본에 특파하는 등 출발부터 정치적인 접근에는 적극적이었던 반면, 병행해서 진행된 제6차 한일회담의 청구권 관련 실무회의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에게 “법률상 근거가 있는 것”만을 요구하겠다고 물러선 것도 청구권을 사사건건 따져 보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청구권이라는 명목을 빌려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경제지원을 받아내겠다는 정치적 욕구의 발현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이후 일본과의 정치적 담판 과정에서 당초 받아내고자 했던 청구권 5억달러를 ‘순(純)청구권+무상지원’으로, 다시 ‘무상지원+유상지원’으로 쪼개는 양보를 거듭한 끝에 결국 김종필-오히라 합의를 통해 ‘무상 3억달러+정부차관 2억달러’로 나누어 받게 된다.

● 일본 측 계산 청구권 고작 7,000만~1,600만달러

그렇다면 당시 일본 측은 청구권 명목으로 어느 정도를 한국에 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법률상 근거가 있는 것”만을 요구하겠다고 밝힌 직후 이케다 총리는 한국의 순청구권에 대해 시산(試算)할 것을 외무성과 대장성에 각각 지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 정권이 기대했던 5억달러와는 크게 동떨어진 숫자였다. 외무성이 7,077만달러 상당의 견적서를 낸 데 대해 대장성은 고작 1,600만달러 상당의 청구권만을 인정했다. 앞서 이세키 외무성 아시아국장이 한국 측에 제시한 7,000만달러도 외무성의 시산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관련 당시 아사히(朝日)신문은 “아무래도 외무성은 외교 교섭의 당사자로서 한국 측 입장도 고려했지만, 절약이 습성인 대장성은 꼼꼼하게 따진 것 같다”면서 “이 와중에 숫자에 강한 이케다 총리는 부처 간에 조율된 금액을 내놓으라며 딴청을 부렸다”고 말했다.

일본 측 외교문서에 따르면 외무성과 대장성이 이처럼 다른 시산 결과를 내놓은 것은 주로 군인·군속, 피징용자에 대한 위로금 및 은급(恩級)에 대한 사정(査定)의 차이에 기인했다. 양측 모두 화폐가치의 변동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한국 측은 1945년 해방 당시의 1달러=15엔 환율의 적용을 주장해 왔다), 남북한 가운데 남한만을 청구권의 대상으로 한 점 등에서는 일치했다. 다만, 대장성은 한국인 군인·군속·문관(文官)의 은급과 사망·부상자에 대한 위로금의 지급이 이들의 일본 국적 상실, 즉 1952년 4월 강화조약 발효를 기해 중단된다고 해석한 반면, 외무성은 국제적 선례에 따라 일본 국적 상실 이후에도 계속 줘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또 대장성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노무자에 대해 미수금 및 기탁금 외에는 어떠한 수당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외무성은 추가적으로 위로금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하간 일본 당국이 한국 측의 청구권으로 인정한 것은 사실상 개인 청구권에 국한됐고, 그것도 지극히 소액이었다.

● 점점 멀어지는 청구권

이 같은 일본 측의 속내도 모른 채 김유택 경제기획원장은 적어도 총액으로 8억달러는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8억달러는 장면 정권 때 이미 목표로 삼은 액수로 박정희 정권이 설정한 세 가지 방안 중 제3안인 청구권 5억달러에 경제지원 3억달러를 더한 숫자였다. 그러나 한국 측의 조급한 움직임에 일본 측이 호응할 리가 없었다. 1961년 9월 7일 회담에서 고사카 외상은 “일본이 청구권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5,000만달러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이어 청구권 이상으로 한국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후원한다는 관점에서 경제지원의 형식으로 호응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접근해 일본으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청구권을 받아내려 했던 박정희 정권의 초기 전략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이후 전개된 제6차 한일회담은 일본 측이 청구권으로는 내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가운데 박정희 정권이 사실상 청구권을 포기하는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1961년 10월 27일부터 이듬해 3월 6일까지 열린 청구권위원회에서 한국 측은 이승만 및 장면 정권기에 상정했던 청구권 내역을 대폭 축소한 6개 항목 십여 건만을 청구권으로서 제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운데 일본 측이 지불 의무를 인정한 것은 우편저금, 징용노동자 미수금 등 한국인 개인 및 법인이 원래 갖고 있던 개인 청구권뿐이었다. 일본이 조선은행 등 일본 내 금융기관의 청산금 반환을 강력히 거부하면서도 이들 금융기관의 한국인 지분에 대해선 청구권을 인정한 것도 이것이 개인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지금(地金) 250톤 등에 대해서는 통상적인 상거래였다면서 청구권을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요컨대 일본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법적이었다고 전제한 후 그 틀 속에서 ‘합법적으로’ 이뤄진 한국인의 경제활동에 따른 재산 및 권리의 ‘반환’만을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여기에 일본 측이 남북한을 분리해 청구권을 주겠다고 주장한 데다 한국 측이 요구한 환율 적용조차 전면 거부하면서 한국 측이 요구한 청구권은 다시 대폭 쪼그라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초기에 꿈꿨던 대일 청구권은 이렇게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한국 측이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숫자’를 채워 넣기 위해서는 청구권을 사실상 포기하고 일본이 원하는 경제협력 형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회에서 다루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부부장의 행보는 청구권이라는 명분을 양보하더라도 어떻게든 총액을 맞춰 보려는 정치담합의 역정이었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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