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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커버스토리] 경직된 조직·서열… '튀는 인간'은 못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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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직장 문화 "참신한 기획도 리스크 크다"
엉뚱한 아이디어로 낙인 일쑤 '천재'를 죽이는 교육
조모(29)씨가 2012년 대기업 입사 후 3년간 했던 업무는 신규사업 기획이었다. 레저용품을 만드는 회사라 좋아하는 여행에 캐릭터를 접목한 사업이 어울릴 것 같아 취업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야심 차게 준비한 기획안은 퇴짜 맞기 일쑤였고, 설령 팀장에게 채택되더라도 다른 실무 부서나 윗선에서 거부됐다. 그는 퇴짜 맞은 아이템을 직접 제작하기로 마음 먹고 지난해 9월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조씨는 “기업이 리스크를 항시 감안해야 하는 특성상 쉽게 신규 사업을 펼치긴 힘들었을 것”이라며 “여행용 웹툰에서 시작해 캐릭터 사업까지 확장하는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북촌마을 인력거 사업에 역발상의 직장문화를 도입한 이인재(30)씨도 첫 직장은 증권회사였다. 그는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가 코네티컷주 웨슬리언대 역사학과 졸업하고, 2010년 귀국해 잡은 직장이지만 이질감만 느낀 뒤 결국 그만뒀다. 그는 “토론문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생각의 자유가 없이 군대 문화가 지속된다는 느낌까지 받아 더 이상 근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우리의 조직 문화, 서열 문화, 기업 문화에서 돈키호테형의 ‘튀는 인간’은 버텨내기가 어렵다. 사회나 조직이 틀을 깨는 새로운 사고와 행동을 포용하는 데 인색하기 때문이다. A기업 마케팅 팀장인 조모(41)씨는 “기업에선 어떤 사업이라도 한정적인 시간과 자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엉뚱한 아이디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6ㆍ25전쟁 이후 빠른 재건을 목표로 하다 보니 일사불란한 조직형 인간을 요구하게 됐지만 개개인의 속내는 불만 가득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며 “이상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괴짜나 부정적 사람으로 낙인 찍는 것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척박한 문화와 환경 탓”이라고 말했다. 이런 풍토에서 개인이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고 도전 정신을 발휘하기가 불가능하다.
물론 급변하는 환경과 세계적인 경쟁체제에서 우리 기업도 혁신의 한 방편으로 이른바 돈키호테형 인재를 발굴해보려는 노력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게 아니다. 굴지의 대기업인 B그룹은 지난해 하반기 대졸 신입공채를 진행, 2,000명 모집에 12만명이 몰렸다. 기존의 모집 방식과 달리 입사지원서에 어학성적, 자격증 등 스펙란을 없애고 자기소개서에 직무와 연관된 연구개발을 위한 능력을 담도록 했다. 창의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실망스런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기업 인사담당자는 “천편일률적인 이력에 진부한 표현이 있을 뿐, 자유롭고 기발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자기 소개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순화적 인간을 요구하는 교육 환경 탓도 있다. 4살 때 IQ 210을 기록하며 기네스북에 오른 김웅용 신한대학 교수는 늘 ‘실패한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는 11살인 1973년 미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78년 귀국했으나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다. 김 교수는 “대학 졸업장을 위해 중ㆍ고교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으며 이마저도 전 과목을 잘해야 해 나로선 역부족이었다”며 “혈연, 지연, 학연을 좋아하는 조직에 합류하기 위해선 이들과 비슷한 무리가 돼야 했지만 난 그게 어려웠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 외무성 국제과학협력실장 시절 노벨상 수상자들과 자주 접했던 미치가미 히사시 전 주한일본공보문화원장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의 연구풍토에 대해 “스승도, 선배도, 학벌도 없이 가차 없는 토론과 비판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도전과 철저한 자유”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은 과학분야에서만 1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같은 듯 다른 한일간의 문화 차이가 낳은 결과다.
우리 풍토에선 제 아무리 뛰어난 돈키호테라 할지라도 틀에 순화되지 못하면 제대로 교육을 받고 성장하기가 어렵다. 이명진 교수는 “‘넌 이걸 하고 이렇게 하면 돼’라는 강요된 교육방식으로 개인의 능동성, 창의성을 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자기 주도성이 결여된 결정장애 현상과도 연결된다. ‘글쎄요’‘알아서 해주세요’라는 표현을 달고 사는 메이비 세대(Maybe generation)가 나타난 게 대표적인 예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자기 중심적인 서구에 비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소비성향도 결정장애의 한 행태”라고 말했다.
기질적인 문제도 거론된다. 돈키호테 무대인 스페인은 세계적으로도 낙천적인 인물이 몰린 것으로 유명하다. 남유럽 특유의 느긋함이 유전적으로 전해져 불황에도 ‘언젠간 잘 되겠지’라는 심리로 견뎌낸다. 반면 미국 버몬트대 피터 도즈 연구팀에서 이뤄진 연구에서 한국은 가장 비관적인 국가로 꼽혔다. 선ㆍ후진국을 포함해 우리나라의 삶의 만족도가 낮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부정적 사고에서 창의성이 발현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일본 야마나카 신야 박사는 ‘인생만사 새옹지마’를 버팀목으로 좌절감을 이겨냈다. 그는 일본의 지방대 의대출신으로 수술도 잘 못해 연구자가 된 평범한 돈키호테다.
2010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제2 인생을 살고 있는 김모(45)씨는 “제주도가 최근 각광 받는 이유도 직장 생활에 지쳐 삶 만족도가 떨어진 도시민들이 이상향으로 알고 찾은 것이 한 몫 했다”고 말했다. 꽉 막힌 조직문화와 몰개성에 대한 개인의 피로도가 높아진 것이기도 하지만 돈키호테적 삶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풍토가 변해야 하는 이유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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