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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 못 갚은 日 전쟁부채 414억엔… 韓·中 민중이 떠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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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 점령지서 전쟁비용 조달… 日 엔화는 한 푼도 사용 안 하고
조선은행권 엔화 무제한 찍어 내… 중일전쟁 때부턴 분식회계로 조달
일본 정부의 예ㆍ결산 자료를 살펴보면 일반회계의 부채 항목에 ‘구(舊) 임시군사비 차입금’이라는 다소 생소한 명목으로 414억2,196만1,575엔이 잡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무려 1,000조엔을 돌파한 일본의 전체 국가부채 규모를 떠올리면 414억엔은 그다지 큰돈은 아니다. 하지만 이 숫자가 일제가 패전한 1945년 이후 70년간이나 물가상승률 등을 일절 반영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일본의 빚으로 기록되어 온 것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본토사수,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국가자원을 총동원해 연합국에 맞섰던 1945년 당시 일제의 국가예산이 214억엔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414억엔이 갖는 현재적 화폐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왜 일본은 이처럼 엄청난 빚을 무려 70년간이나 갚지 않은 채 안고 왔는가. 여기에는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이에 따라 동아시아 민중이 감수했던 희생의 실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전쟁을 일으켜 전쟁을 유지한다”
전쟁은 ‘돈의 싸움’이기도 하다. 많은 연구자들은 일본처럼 부존자원이 부족한 섬나라가 어떻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45년까지 무려 8년간이나 중국 대륙과 아시아, 태평양 등에서 미국 등 열강들과 전쟁을 치를 수 있었는지 탐구해왔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종합 경제력에서 미국의 8분의 1에 불과했던 일본이 어떻게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막대한 전비를 감당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거리였다.
이 의혹에 대해 다다이 요시오(多田井喜生)의 저서 ‘대륙으로 건너간 엔(円)의 흥망’과 이를 토대로 2011년 8월 방영된 NHK 스페셜 다큐멘터리 ‘엔의 전쟁’은 중요한 시사를 준다.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이었던 조선은행의 전후 일본 내 자산으로 만들어진 일본채권신용은행에서 상무로 근무하면서 ‘조선은행사’를 편찬하기도 한 다다이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본은 중국대륙에서의 전쟁에서 일본 엔화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도대체 무슨 돈으로 전쟁을 치렀다는 말인가.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은 남만주철도를 폭파한 뒤 중국 군벌 소행이라며 중국을 침략한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중국 동북부 지역에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운다. 이를 획책하고 주도한 것은 관동군 참모였던 이타가키 세시로(板垣征四郞) 대좌와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중좌였다. 이들은 그러나 당시 일제의 비확산방침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만큼, 전쟁수행에 필요한 군자금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이들을 지배한 생각은 ‘전쟁을 통해 전쟁을 치른다’ 즉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정복한 지역에서 필요한 물자와 자금을 조달한다는 황당한 ‘전쟁 경영학’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겨 정복하더라도 약탈하지 않는 한 전비 확보가 불가능하고, 무력으로 약탈하면 장기전을 치르는데 필요한 자금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얻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이러한 관동군에 구세주였던 것이 다름 아닌 조선은행의 엔화였다. 조선은행은 조선은행권의 발권을 통해 관동군의 대륙 침략에 필요한 군자금을 댔다. 당시 일본은 본토의 일본은행권과 식민지의 조선은행권, 대만은행권 등 세 가지 서로 다른 엔화를 발행했다. 이들 엔화는 같은 가치를 갖고 상호 교환이 가능했다. 식민지 경제가 무너지더라도 본토에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굳이 서로 다른 엔을 찍어낸 것이다. 여기에 조선은행은 중국으로의 영업망 확대라는 상업적 욕망을 드러내면서 관동군의 세력 확장에 적극 편승했다.
● 점령지서 군비조달 엔화 마구 찍어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등 일본의 침략노선이 확대일로를 걸으면서 조선은행권만으로는 늘어나는 전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행이 발행한 엔화는 좀체 중국의 인민경제에 침투하지 못했다. 이때 일본군이 구상한 군사비 확보책이 바로 ‘아즈케아이’(預け合い)라는 금융조작이었다. 요즘의 금융용어로 하자면 일종의 위장 콜거래, 즉 실제 콜거래는 자금의 이동이 있어야 하는데 장부상으로만 허위로 자금을 이동시키는 일종의 분식회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수법은 다음과 같았다.
중국 화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제2의 만주국 건설을 추진해온 관동군은 1937년 12월 베이징을 중심으로 중화민국임시정부라는 괴뢰정부를 수립, 중국연합준비은행권(연은권)을 발행하도록 했다. 1938년 6월16일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은 중국연합준비은행(연은)과 ‘아즈케아이’ 계약을 체결, 각각 상대측 은행에 예금계좌를 개설했다. 관동군이 군사비를 요구해오면,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은 보유중인 연은 명의의 일본 엔화 예금계좌에 해당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기재한다. 이 예금계좌에는 일제가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이 입금된 것으로 기록됐다. 이를 담보로 연은은 조선은행 베이징지점 명의의 연은권 예금계좌에 같은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적은 후 이에 상당하는 연은권을 찍어 군사비로 내줬다.
그러나 당초 일제가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은 실제로는 중국으로 송금되지 않은 채 조선은행과 연은의 예금계좌에 금액만 기재될 뿐인 ‘가짜 예금’이었다. 때문에 연은권의 발권 담보가 된 엔화 자금은 모두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고스란히 남았다가 일본 국채를 구입하는데 사용됨으로써 다시 일본은행의 국고로 되돌아갔다. 요컨대, 일제는 일본군의 군사비 지출인데도 일본 엔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조선은행이라는 방파제를 앞세워 무제한으로 현지통화를 발행해 군자금을 충당한 것이다.
이렇게 관동군은 1945년 8월 패전 때까지 무려 850억엔을 군사비로 당겨썼다. 이 돈으로 최대 100만명에 이르렀던 일본군 병사가 사용한 각종 전쟁물자는 물론이고 무기 제조를 위해 중국 현지에서 일본 국내로 보낼 원자재나 곡물까지 사들였다. 중국인 및 한국인에 대한 인체실험으로 악명 높았던 731부대도 이 돈으로 유지됐을지 모른다. 일본 기업들은 빈손으로 중국으로 진출한 후 이 돈으로 대출을 받아 시장을 장악해나갔다. 다다이의 표현을 빌리면 일제는 돈 한 푼 안들이고 ‘종이’로 전쟁 장사를 한 것이었다.
● 414억엔 ‘지울 수 없는 전쟁의 각인’
이 같은 전대미문의 금융조작은 일본이 전선을 태평양으로 확대하면서 모든 전쟁터에 적용됐다. 전후 A급 전범으로 사형이 집행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1943년 3월 “모든 전비를 ‘아즈케아이’로 조달하라”고 지시한다.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 장교들이 주장한 ‘전쟁을 통해 전쟁을 치른다’는 무모한 발상이 국책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군에 군자금으로 현지통화를 공급하기 위해 조선은행만이 아니라 요코하마정금은행, 남방개발금고 등이 추가로 동원됐다. 특히 요코하마정금은행은 ‘아즈케아이’ 수법으로 2,800억엔 이상의 군자금을 댔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개시한 1937년 국가예산의 60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전혀 보장이 되지 않는 통화권의 남발은 당연히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중국에서는 3만배 이상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일제가 점령한 지역의 경제는 일제의 전쟁비용까지 감당하면서 뿌리째 붕괴됐다. 관동군은 군자금으로 이용하던 연은권을 강제로 유통시키기 위해 이 돈을 쓰지 않는 중국인들에게 무기징역형 등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그러나 숫자는 쉬 지워지지 않는다. 금융조작을 통해 전비를 충당했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일본의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 빚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은 패전으로 치닫던 1943년 8월초 이것이 나중에 심각한 문제가 될 것으로 보고 그 동안 송금하지 않았던 엔화 자금을 풀어 급하게 빚 청산에 나섰다. 일본군이 보유하고 있던 금괴 16.7톤을 서둘러 팔아 조선은행 예금 435억엔 등을 변제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패전을 눈앞에 두고 점령지에 뿌려진 괴뢰은행의 통화가 한낱 ‘종이조각’이 된 시점에서 이뤄진, 그야말로 급조된 ‘장부 지우기’에 불과했다. 더구나 일제는 모든 기록을 지우지도 못했다.
일본의 ‘전쟁 장사’가 끝난 지 70년이 지났지만 전후 일본의 일반회계에는 전쟁부채의 일부인 414억엔이 남았다. 이를 두고 NHK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일본의 전쟁에 대한 각인”이라고 말했다. 채권자는 누구일까. 일제의 전비 조달에 동원된 조선은행과 중국의 괴뢰은행, 요코하마정금은행 등은 오래 전에 모두 사라졌다. 일본이 부담해야 마땅했던 전쟁비용을 사실상 대신 감당하고 전후에는 일본이 남긴 ‘휴지조각’을 부여잡고 울분을 삼켰던 중국과 한반도의 민중은 침묵해왔다.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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