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전 막판까지 로비·암투… 인구 편차 조정 않고 의석수만 불리기도

입력
2015.01.05 04:40

국회의사당.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회의사당. 한국일보 자료사진

19대 총선을 두 달여 앞둔 2012년 2월 15일 오후 2시 반쯤 국회 의원회관 지하1층 주차장에서 새누리당 소속 두 의원이 ‘육박전’을 벌였다. 드잡이를 한 채 고성을 지르던 이들은 검사 출신 주성영 의원과 판사 출신 여상규 의원. 10여분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동안 양측 보좌진들도 주먹다짐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한 보좌진은 피까지 흘렸다.

당시 주 의원은 선거구획정을 논의하던 국회 정치개혁특위 간사였고, 경남 남해ㆍ하동 출신인 여 의원은 지역구가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컸다. 거의 매일 주 의원을 찾아가 항의하던 여 의원은 이날은 아예 오전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다 마침내 차를 타고 나가려던 주 의원을 붙잡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며 격하게 항의하다 몸싸움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두 의원의 충돌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었다. 정치권에선 4년에 한번씩 총선이 치러지는 해 2월이면 어김없이 몸살을 앓는다. 지역구 선거구를 조정하는 문제 때문이다. 선거구 조정 결과에 따라 당락이 좌우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현역의원을 포함한 모든 후보자들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선거구획정은 선거를 치르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선거구역의 범위를 정하는, 일종의 ‘선긋기’다. 이게 늦어지면 예비후보들과 선관위, 유권자들이 모두 혼란과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국회의장 자문기구로 꾸려지는 선거구획정위원회로 하여금 총선 6개월 전까지 안을 마련해 보고토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 차례의 총선에선 매번 선거일이 코 앞에 닥쳐서야 선거구가 최종 결정됐다. 막판까지 치열한 로비와 암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2년 19대 총선 때는 선거일(4월 11일)을 불과 한달 보름 정도 앞둔 2월 27일에야 선거구 조정이 이뤄졌다. 18대 총선(2008년 4월 9일)과 17대 총선(2004년 4월 15일) 때도 각각 50일 전, 37일 전에야 선거구가 확정됐다. 정치권 내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지 못한 채 아웅다웅하다가 결국 선거일이 닥쳐서야 선거구획정안을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한 것이다.

선거구획정 시기가 늦어지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체로 ‘질 나쁜’ 선거구획정이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선거구 조정이 필요한 직접적인 이유는 유권자 수의 증감인데, 영남권과 호남권에 뿌리를 둔 여야 거대정당들이 인구 감소와 무관하게 텃밭의 선거구 수를 유지하려고 ‘꼼수’를 쓰다 보니 결국 게리맨더링으로 귀결된 것이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진행된 선거구획정만 해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가 많았다. 경기 수원정은 팔달구 전체에다 권선구의 서둔동만을 떼어내 붙여 만든 선거구다. 용인갑도 처인구 전체와 기흥구 일부를 합쳤다. 경기 양평ㆍ가평ㆍ이천과 충남 천안갑 등도 비슷한 경우다. 여야가 영ㆍ호남 지역구 수를 각각 1석씩만 줄이기 위해 수도권ㆍ충청권에서 분구를 최소화하도록 선거구역을 임의로 조정한 것이다.

2004년 17대 총선 때는 인구편차를 4대1에서 3대1로 줄이라고 한 헌재의 2001년 결정을 따른다는 명분을 앞세워 273석이던 의원정수를 299석으로 늘렸다. 인구편차를 실질적으로 조정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이 아예 선거구 숫자를 대폭 늘린 것이다. 헌재의 기준에 맞춘다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여야 모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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