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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갑질의 말로

입력
2014.12.18 20:00

예부터 부자라고 다 같은 부자가 아니고 양반이라고 다 같은 양반이 아니었다. 부자 중의 부자를 갑부(甲富)라고 하고 문벌 중의 문벌을 갑가(甲家) 또는 갑문(甲門)이라고 한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문호에 갑을이 있음을 어찌 알겠는가(那知門戶有甲乙)”라고 읊은 것처럼 양반 문벌에도 갑이 있고, 을이 있었다. 물론 모든 재산과 권력이 나쁜 것은 아니다. 현재도 빌 게이츠 부부는 막대한 재산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서 전 세계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고려 후기 갑부는 뜻밖에도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었다. 조선 5대 임금 문종의 휘(諱)가 이향(李珦)이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그를 안유(安裕)라고 불렀는데, 조선 초기의 문신 성현(成俔)의 외가가 안향과 같은 순흥(順興) 안씨였다. 성현은 용재총화(?齋叢話)에서 안향의 돈 씀씀이에 대해서 설명했다. 고려 때는 과거의 시험관이었던 지공거(知貢擧)와 과거 급제자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시험관은 은문(恩門), 급제자는 문생(門生)이 되었는데, 문생은 은문을 부모처럼 여기고 은문도 문생을 자체처럼 대해서 데릴사위도 못 들어가는 내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지공거는 급제한 문생들을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안향도 지공거로 과거를 주관한 후 급제자 30명을 모두 초청했다. 이때 30명 모두에게 담비털로 만든 이불과 만루은잔(萬縷銀盞)을 주어 문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요즘말로 통 크게 쐈다는 이야기다. 재산으로 마음을 사려는 태도지만 윗사람이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쓴 것이니 그나마 낫다.

북송(北宋)의 태종(太宗)이 이방(李昉) 등에게 편찬을 명해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984) 완성한 백과사전이 태평어람(太平御覽)인데 그 종친부(宗親部)편에 부자의 행태를 경계하는 구절이 있다. 태자사부(太子太傅)였던 소광(疏廣)이 “어리석은 자가 재산이 많으면 그 지나침을 더한다”면서 “부자는 여러 사람이 원망한다”고 경계한 것이다. 부자가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사면 몰락의 조짐이라는 것이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부자는 여러 사람들이 원망한다”는 뜻의 ‘부자중원(富者衆怨)’이 있다. 이익은 이 글에서 “내가 내 재물을 모으는데 어찌 해가 있겠는가라고 하지만 남은 없는데 나만 있으면 해치려는 자가 있게 되고, 남은 잃는데 나만 얻으면 노하는 자가 있게 되며, 남들이 우러러보는데 내가 인색하면 서운해 하는 자가 있게 된다”라고 갈파했다. 부자에 대한 원망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 때는 더 큰 폭발성을 갖는다. 조선 후기 문신 이현일(李玄逸)은 숙종 16년(1690) 12월 경연에서 숙종과 자치통감강목을 강독하던 중 이런 말을 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균전제에 대해서 강론할 때였다. “토지 소송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신은 오랫동안 시골에 살아 그 폐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릇 땅이 황무지가 된 햇수가 오래된 곳을 소민(小民ㆍ가난한 백성)들이 풀을 베고 나무를 베고 온갖 힘을 다해 경작해 놓으면, 부호(富豪)들이 혹은 공문서 한 장으로 공공연하게 빼앗으니, 소민들이 여러 해 동안 수고하고 고생한 것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의 소유가 돼버립니다.”(이현일, ‘경연강의(經筵講義)’, 갈암집(葛庵集)) 가난한 백성들이 온갖 고생을 다해 황무지를 개간해 놓으면 부호들이 땅문서 한 장을 들고 와서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럴 때 소민들은 국법에 기대는데 얼마 전 대형마트의 손을 들어준 서울 고법의 판결처럼 국법은 권세가의 편이기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에 쌓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 재해가 인다는 것이 동양의 전통사상인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었다. 성호 이익은 앞의 글에서 “혼자서만 부를 누리면 원망이 모여드는데 원망이 극도에 달하면 비방이 생기고, 비방이 생기면 화(禍)의 빌미가 되고, 재앙이 빌미가 되면 몸이 망하는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서 이런 원망이 쌓여 “결국 후손이 끊어지거나 혹은 재앙을 만난 경우를 역력히 셀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익은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일 수 있고 많이 쌓인 훼방은 뼈도 사그라지게 하는데,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것이다. 요즘에 왕왕 탐독(貪?)하는 사람들은 뒷날에 이런 꼴이 될 것을 모르고 있으니, 비웃을 만하다”라고 경계했다.

현재 쇠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여러 입을 들끓게 하는 땅콩회항 사태도 세상사 이런 이치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되지도 않는 주식으로 황제경영이 가능한 구조가 더 문제다. 새정치연합 비대위원장의 취직청탁에서 드러난 것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재벌과 정치권력의 내밀한 결탁이 슈퍼 갑질이 가능한 구조적 원인이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제대로 된 정치권력이 만난다면 얼마 되지도 않는 주식으로 행하는 슈퍼 갑질 종식이 그리 어렵겠는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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