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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상피제(相避制)와 국토부 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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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끼리 같은 부서에 근무하지 못하게 한 것이 상피제, 즉 상피법(相避法)이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선종 9년(1092) 11월조에 “오복(五服) 친족끼리 상피법을 정했다”고 전하니 지금으로부터 1,000년 이상 된 법임을 말해준다. 오복이란 누군가 상을 당했을 때 함께 상복을 입는 사이를 뜻하는데, 그 친소에 따라 참최(斬衰ㆍ3년)ㆍ재최(齊衰ㆍ1년)ㆍ대공(大功ㆍ9개월)ㆍ소공(小功ㆍ5개월)ㆍ시마(?麻ㆍ3개월)의 구분이 있었다. 참최 3년복은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경우이니 형제 사이를 뜻하고, 시마 3개월복은 종증존자가 종증조부모의 상을 당했거나 재종질이 재종숙이나 재공고모의 상을 당했을 때 입으니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그런데 이런 친족끼리도 같은 부서에 근무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태종 14년(1414) 4월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 이직(李稷)이 사직했는데, 영부사(領府事) 하륜(河崙)과 상피관계라는 이유였다. 판의정부사는 좌ㆍ우의정의 전신인데, 이직은 하륜의 아내 이씨의 종제(從弟)였다. 그런데 영부사는 의정부 등에서 물러난 원로 고관들에게 녹봉을 주기 위해서 임명하는 명예직으로서 아무 직무가 없었다. 그래서 태종은 이직의 사직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특수한 경우이고 고려, 조선에서 친족은 같은 부서에서는 근무하지 못하는 상피제가 엄격했다. 예를 들어서 이현보(李賢輔)가 쓴 ‘금산 군수(錦山郡守) 이공(李公) 묘지명’에 따르면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인 이중휘(李重輝)는 현종 시절 과천(果川)현감으로 공을 세웠는데도 감사와 상피관계라는 이유로 그만두어야 했다.
상피제를 실시한 이유는 권력의 집중을 막고, 국사 처리에 사정(私情)이 개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상피제에 걸렸는데도 사퇴하지 않을 경우 양사(兩司ㆍ사헌무, 사간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상피제가 엄격하다보니 직무에 맞는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재위 12년(1430) 2월 “전조(前朝ㆍ고려) 말기에 조사(朝士ㆍ벼슬아치)들의 상피법이 심하게 번거로워서 이성(異姓)의 7촌, 8촌도 피해야 하니 옥송(獄訟)이 지연되어서 오랫동안 판결이 내려지지 않는다”면서 상피제의 한계를 의논해서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이 문제는 세종 14년(1432) 사촌(四寸)까지 피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성종 때 정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에는 대공복(大功服) 이상의 상복을 입는 본종(本宗ㆍ성과 본이 같은 친척)이나 사위, 손자사위, 손위ㆍ손아래 매부와 시마복(?麻服ㆍ석달복) 이상의 상복을 입는 외가 사람들과 동서, 손위ㆍ손아래 처남 등은 같은 부서에 근무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정부(議政府)나 의금부(義禁府)ㆍ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 문ㆍ무관의 인사권이 있는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등은 훨씬 엄격해 4촌 매부ㆍ4촌 동서까지 포함시켰다. 세종이 상피제 때문에 옥송(獄訟)이 지연된다고 말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상피제가 특히 엄격하게 지켜지는 곳이 노비변정도감이었기 때문이다. 노비변정도감은 노비 문제에 대한 소송을 담당하는 기관인데, 노비 소유권은 당사자의 이해가 크게 엇갈리는 재산 문제였기 때문에 특히 엄정해야 했던 것이다. 과거 시험관도 상피제가 엄격해서 친족이 과거에 응시했으면 시험관을 사퇴해야 했다. 그래서 노비변정도감이 혁파된 후 노비문제는 장례원(掌隷院)에서 관장했는데, 장례원에 친척이 있을 경우 노비소유권 문제가 있어도 소송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검찰이나 법원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쾌재를 부르며 달려가는 현상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그릇된 유산이다. 친척이 장례원에 있으면 소송을 정지하고 그 친족이 다른 자리로 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마음은 급한데 친족의 벼슬이 갈릴 때까지 기다리자니 속이 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편법들이 등장했는데 유사한 기능이 있는 다른 부서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장례원에 상피할 것이 있으면 노비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또 다른 기관인 형조로 이관하고, 형조에 상피할 것이 있으면 한성부로 이관하고, 한성부에 상피할 것이 있으면 사헌부로 이관하고, 사헌부에 상피할 것이 있으면 의금부나 사간원으로 이관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판결이 늦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성종 4년(1473) 대사헌 서거정은 각 관청에서 소송하려는 사람이 상피에 걸리면 예전대로 소송을 정지하고 당사자가 다른 자리로 갈 때까지 기다리든지, 부득이 소송을 제기해야 할 경우에는 상피에 걸린 관원은 배제하고 다른 관원이 맡아서 처리하게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땅콩 회항 사건을 조사하는 국토부 조사관에 대한항공 출신들이 포함되었다고 해서 비난이 거세다. 심지어 대한항공 직원들이 기자들의 출입까지 막았다니 언제부터 국토부 청사가 대한항공 관할건물이 되었는가? 선조들의 상피제 정신을 살리는 입법이 필요하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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