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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나라

입력
2014.12.15 18:30

산업부에서 일하던 몇 년 전 한 대기업 홍보임원과 첫 인사를 나눴는데, 그가 ‘부탁’이 있다고 했다. 초면에 무슨 부탁할 게 있을까 싶었는데, 그는 “다른 취재 지원은 다 해드릴 테니 제발 사장님 면담 요청만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공식 회의가 아니면 한 달에 한두 번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덧붙였다.

며칠 후 다른 대기업의 홍보팀장에게 이 얘길 전하며 “상무가 사장 만나는 게 무슨 하늘의 별따기라도 되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너 일가 사장이니 그 임원이 그렇게 얘기하는 건 당연하다”면서 “대기업 출입하다 보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보다’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최근 ‘땅콩 회항’ 논란이 불거진 뒤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ㆍ왕과 제후와 장수와 정승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라는 말이 다시 생각났다. 조현아 전 부사장이 기내에서 저지른 ‘갑질’과 전력을 전해 듣노라면 한진그룹 오너 일가가 자신들을 왕후장상의 씨로 여기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일각에선 이런 얘기도 한다. 당시 기장과 사무장이 자신들의 역할과 권한을 분명히 전하며 회항 요구를 거부했어야 한다고, 그랬다면 오히려 나중엔 고마워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결과’를 가정할 수 있을 정도라면 애초부터 조 전 부사장의 몰상식한 갑질은 없었어야 한다.

우리나라 재벌 대기업의 경영권이 2,3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잡음이 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기업이 가진 유ㆍ무형의 자산을 사적 소유물로 여기는 듯한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보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승계 자체가 아니다. 보유지분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면야,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면야 누가 뭐라고 하겠나.

본질적으로는 ‘사람’이 되어 있느냐다. 수많은 직원들과 소비자들을 존중하고 위하는 겸손함과 측은지심, 그리고 ‘노블리스 오블리제’. 조 전 부사장이 초반에 ‘무늬만 사과’를 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은 과정에서 대한항공 직원들 중 누가 어떤 직언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설령 직언이 있었더라도 결코 수용되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불거진 박근혜정부 비선실세 국정 농단 의혹을 보면 왕후장상의 씨는 비단 재벌가에만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는 인사들, 이번 파문을 통해 공론의 장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언행을 보면 하나같이 박 대통령 일가를 왕후장상의 씨로 떠받드는 듯하다.

권력암투설의 한 축인 정윤회씨와 이른바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 총무비서관ㆍ정호성 제1부속실 비서관ㆍ안봉근 제2부속실 비서관)이 그렇고,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진이 그렇고, 정홍원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무직 장관들이 그렇고, 김무성 대표와 이완구 원내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지도부가 그렇다.

정국이 이처럼 어수선한데 어쩌면 이렇게 누구 하나 직언했다는 얘기도, 쓴 소리를 했다는 얘기도, 국정쇄신을 촉구했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 걸까. 특히 표심을 먹고 산다는 새누리당에선 지도부를 포함해 전체 소속의원의 40%에 달하는 60여명의 의원들이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는데, 인구에 회자되는 얘기가 ‘각하’라는 호칭뿐일 수 있을까.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던 한 새누리당 의원은 “박 대통령의 임기가 아직 반환점도 돌지 않았으니 의원들 입장에선 서슬 퍼런 청와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항변했다. 그는 여권 내 대표적인 쇄신파로 통한다.

이번 파문과 관련해 결국 최종적으로는 박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지적이 많다. 청와대 참모진이나 정부 부처와 같은 공적인 통로보다 일부 측근들의 조언을 더 중시한다거나, 한번 싫은 소리를 들으면 두 번 다시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등의 얘기 때문이다. 주변 인사들로 하여금 존경과 존중보다는 두려움에, 대화와 토론보다는 지시에 익숙하게 만든 당사자가 바로 박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대기업 오너 일가가 자신들을 ‘선택받은 사람들’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갑질을 해대면, 직원들은 다른 무엇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한다는, 24시간 내내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뭘 바라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정치와 행정영역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양정대 정치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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