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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재벌의 품격

입력
2014.12.1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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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 재벌 오너의 딸이 사고를 쳤다. 자사 승무원이 1등석 승객인 자기한테 포장 땅콩을 봉지째 건넸단 이유로 이미 출발한 비행기를 되돌려 사무장을 쫓아내는 희대의 ‘갑질’을 시전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나 ‘21세기 자본’ 같은 인문서가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요즘은 불평등에 대한 거부감이 고조된 시기다. 싸잡아 매도하면 억울한 재벌도 없지 않겠지만 미꾸라지가 한 마리는 아니다. 사진은 8월 건배 중인 문제의 조현아(왼쪽 두 번째)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항공사 재벌 오너의 딸이 사고를 쳤다. 자사 승무원이 1등석 승객인 자기한테 포장 땅콩을 봉지째 건넸단 이유로 이미 출발한 비행기를 되돌려 사무장을 쫓아내는 희대의 ‘갑질’을 시전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나 ‘21세기 자본’ 같은 인문서가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요즘은 불평등에 대한 거부감이 고조된 시기다. 싸잡아 매도하면 억울한 재벌도 없지 않겠지만 미꾸라지가 한 마리는 아니다. 사진은 8월 건배 중인 문제의 조현아(왼쪽 두 번째)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벌은 나라를 먹여 살린다. 자선도 베푼다. 교양 발린 화사한 얼굴로. 아비 잘 둬 호사다. 섬광처럼 위선은 솟는다. 수틀리면 갑질이다. 그게 민낯이다. 슬프다. 세습이 격을 깎는다.

“지난해 ‘라면 상무’ 사태 때만 해도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은 자신이 1년여 뒤 ‘땅콩 부사장’으로 불릴 것이란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 이번에 대한민국 사회가 조현아를 매몰차게 몰아친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다. 우선 감정 노동자들의 울분을 다시 자극했다. (…) 라면 상무에 당한 승무원은 최악의 경우 “미친 X에게 물린 셈” 칠 수도 있다. 하지만 땅콩 부사장은 다르다. 그는 오너일가다. 임직원에겐 무소불위의 권력자요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그에게 혼난 사무장은 당시 뭘 생각했을까. 자존심? 분노? 수치? 아닐 것이다. “제발 잘리지만 않게 해달라” 속으로 빌었을 것이다. (…) 둘째, 박근혜 정부의 경제 살리기에 역행했다. 국회는 지난 2일 가업승계공제를 확대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안을 부결시켰다. 여야가 같이 반대했다. 국민 정서상 ‘부의 대물림’으로 비치는 법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 당장 대기업 규제 완화 법안들이 줄줄이 제동이 걸릴 수 있다. (…) 셋째, 반재벌 정서를 키웠다. (…) 이제 비행기 이륙이 지연될 때마다 승객들은 기장의 안내방송을 믿지 않고 다른 나쁜 기억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오너 일가가 탔나, 또 누굴 혼내나.” 넷째, 오너 리스크를 키웠다. 3세·4세 경영을 보는 시선이 더 따가워질 것이다. 가뜩이나 한국 재벌의 세습 경영에 안팎의 비판이 많다. 사회적 압력이 커지면 다른 재벌까지 기업 의욕이 꺾이고 경영 위축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합해지면 주춤했던 경제 민주화 논쟁이 다시 달아오를 수 있다. (…) 다섯째, 자영업자 양산을 더 부추길 것이다. 한국의 자영업 비중은 세계 최고다. (…) 내면엔 샐러리맨 시절 오너 갑질에 가슴 상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변변한 일자리도 없지만 그런 갑질에 또 당하느니 망해도 내 일을 해보겠다는 오기 같은 거다. 그런데도 대한항공의 인식은 국민 의식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직원에 책임을 미룬 해명, 당사자는 등장하지도 않는 사과 같지 않은 사과, 면피와 찔끔찔끔 눈치보기식 인사조치. 그러니 국민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면 “대한항공 1만8000여 임직원이 조씨 일가의 머슴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가 지금 던지고 있는 것이다.”

-조현아가 남긴 것(중앙일보 ‘이정재의 시시각각’ㆍ논설위원) ☞ 전문 보기

“‘땅콩 분노’(Nuts Rage)가 일파만파다. 전 세계에 방송되는 영국 BBC월드와 일간지 가디언, 미국 블룸버그, AP통신 등 외신은 ‘너츠’(Nuts)라는 단어와 함께 8일 재벌 3세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에 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 ‘땅콩’(Nuts)은 무분별한 항공기 회항의 원인이 된 마카다미아넛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다. 영미권에서 땅콩ㆍ견과류(Nut)는 중의적으로 사용된다. ‘정신 나간 사람’, ‘미치광이’, ‘제정신이 아닌자’의 의미가 추가돼 ‘땅콩 분노’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단순하게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 BBC는 기사에서 국토교통부가 조 부사장의 항공법 위반 여부를 조사한다면서 공무원이 “비록 부사장이라고 해도 그 당시에는 승객이기 때문에 승객으로서 취급되고 행동했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재벌 봐주기나 눈치 보기가 아니라 엄정하게 조사하고 적절하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평범한 시민의 생각이자 기대다. 대한항공의 부사장으로서 기내 서비스와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조 부사장은 자사의 서비스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충분히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를 비행기 내에서 고함을 지르거나 승무장에게 내리라고 명령하는 형태로 표출해서는 안 된다. (…) 재벌 3세의 부당하고 절제되지 않는 리더십에 다수의 시민이 분노하는 가운데 대한항공 이름으로 나온 사과문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제대로 된 임원이라면 대한항공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회사 명의의 사과문을 완강히 거부하고, 조 부사장 개인 이름으로 사과문을 냈어야 옳았다. 사과문 내용도 문제다. 조 부사장의 월권적이고 부적절한 행위를 한결같이 옹호하고 변명하고 있다. “승무원 교육을 더 강화해” 서비스의 질을 높이겠다는 대목에서는 헛웃음이 나온다. 승무원으로 십여 년간 전문성을 길러온 사무장이 사표 제출을 직간접적으로 압박받거나, 그 사과문의 불똥이 자칫 기장으로 튀지 않을까 우려된다.”

-‘땅콩 부사장’(12월 10일자 서울신문 ‘씨줄날줄’ㆍ문소영 논설위원)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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