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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없는 삶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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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파악하자는 것은 피상적인 습관에서 벗어나
아무리 끔찍한 얼굴이라도 그 얼굴과 대면하자는 것"
이제 여섯 달이 지났다. 그날 304명의 생사람이 바닷물 속에서 숨졌으며, 그 가운데 열 사람은 시체로조차 아직 가족의 품에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여러 날 눈물을 흘리며, 그 가족들이 느낄 고통을 똑같이 느끼려 했다. 어떤 사람은 언제라도 그런 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이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제 깊이를 일깨워준 그 슬픔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사실은 엄연한데 무른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 애타는 슬픔이 가슴 속으로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교통사고’를 운운하고 ‘대박 보상금’을 말하며 희죽거리는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약점을 전략지점으로 삼아, ‘민생’을 내세우고, 가슴이 타버린 사람들 앞에서 인간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짓을 저지르며, 자기들의 세력을 과시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모든 국민이 슬픔에 지쳤다고 당당히 말한다. 어쩌면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부터 이미 지쳐 있었다.
한 번 뒤떨어지면 영원히 뒤떨어진다고 여기저기서 으르대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옆도 뒤도 바라보지 못하고 앞을 향해 달려간다. 오직 앞을 바라보는데, 그 앞이 다음 발자국이 떨어질 그 자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영화에서 기억이 15분에 그치는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 우리의 삶도 그 사람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점수 한 점을 더 따려고, 제 자식에게 점수 한 점을 더 따게 해주려고, 더 좋은 대학에 가려고, 제 자식을 더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날마다 발등에 떨어지는 불을 끄려고, 우리는 앞을 향해 달려갔다. 그 앞은 지평선이 아니었다. 제 앞을 달려가는 사람의 등이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고향의 부모를 만나러 갈 시간이 없었다. 책 한 권을 독파할 시간이 없었다. 옆 사람의 사정을 길게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그 사이에 틈이 나면 우리는 스마트폰에 코를 박았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갈 것이, 아니 제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갈 것이 두려웠다. 마음의 깊이건, 사물의 깊이건, 세상의 깊이건, 기억의 깊이건, 깊이는 앞으로 달려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세월호의 슬픔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는 저 사람들의 말은 이 점에서 틀린 것이 아니다). 발목을 잡히지 않으려고 우리는 겉껍질 위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피상적으로 살아왔다.
피상적인 삶은 기억 속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기억을 위로 떠올리지도 못하는 삶이다. 1977년에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나 한 도시 전체가 참화를 입었던 일도, 1994년에 성수대교가 무너져 50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났던 일도, 그 다음 해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500여명이 죽고 1,000명 가까운 사람이 다친 일도 우리는 잊고 살았다. 이 망각의 덕분에 우리가 발목을 잡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가. 피상적인 삶은 우리를 허약하게 만든다. 드라마를 보아도, 영화를 보아도, 우리는 끔찍한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누구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누구와 누구를 결혼시키라고, 인터넷에 수많은 댓글이 달리지 않는가. 우리는 그 참혹함을 견디려 하지 않았으며, 견뎌낼 힘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의 참혹함을 애써 피하려 할 때, 참혹한 사건들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한 바탕 발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호가 침몰하며 300여 생령을 물속에 밀어 넣었다.
세월호 특별법의 가장 뜨거운 쟁점은 진상규명이다. 그 죽음의 배가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싣고 항구를 떠날 수 있었는지, 왜 관계기관은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지 않았는지, 왜 정부는 그 귀중한 시간에 우왕좌왕하고 있었는지, 그 진실을 파악하자는 것은 반드시 누구를 벌주고 누구를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피상적 습관에서 벗어나 아무리 끔찍한 얼굴이라도 그 얼굴과 대면하자는 것이고, 튼튼한 기억과 강인한 힘으로 인간의 삶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피상적인 삶은 백 년을 살아도 살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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