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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의 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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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익부 빈익빈이 실증됐다. 젊은 프랑스 경제학자에 의해서다. 이제 쟁점은 그게 옳은지다. 재분배를 서민은 바란다. 부자가 세금을 더 내는 게 정의다. 하지만 왜 그들이 그러겠는가.
““요즘 한국 경제학자들이 하는 일은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수학에 더 가깝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던 경제학자인 이정우 경북대 교수의 비판이다. (…) 이 교수의 쓴소리는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로 인해 나온 것이다. 그는 15년 동안 무려 300년간에 걸친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소득과 부의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뒤 『21세기 자본』을 써냈다. 역사와 정치, 문학적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 중요한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 수학적·추상적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는 경제학계의 풍토에 경종을 울렸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피케티는 자본수익률은 경제성장률보다 높아 자본가는 더 많은 소득을 갖게 되고 소득불평등은 악화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세습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를 바로잡기 위해 상위 1%의 고소득층에 80%의 누진소득세를 물리고, 각국이 부자의 자산에 최고 10%의 글로벌 부유세를 부과하자고 제안했다. 이 돈을 가난한 사람의 소득을 늘리고 복지에 쓰자는 것이다. 과격하게 들리지만 민주적 통제를 통해 자본주의를 보존하자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파괴하자는 마르크스와는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 땀 흘려 벌기보다는 아버지를 잘 만나야 잘사는 세습 자본주의를 고치기 위해서는 부유층에 세금폭탄을 때리자는 그의 메시지는 결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한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그가 오기도 전에 비판서까지 냈다. 이들은 피케티가 문제 삼은 불평등을 옹호한다. 상대적 소득 격차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불가피하며, 결과의 불평등은 오히려 동기를 유발한다고 반박한다. 그가 지적한 세습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한국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노무현 정부가 경영권 승계 시 상속 증여세율을 65%로 가혹하게 올렸고,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상속세율에 비해 두 배나 높다는 점을 제시한다. (…) 불평등의 해소와 증세가 안팎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데도 이 정부의 누구도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담뱃세에 이어 지방세인 주민세와 자동차세를 올린다고 불쑥 발표했을 때 당혹스러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세금은 소득과 무관하게 같은 액수를 내는 간접세여서 서민의 부담만 늘었다. 한국은 소득세를 포함한 직접세의 비중이 낮아 조세로 인한 소득 불평등 개선효과가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이다. 그런데도 불평등 해소와 충돌하는 역진세를 늘리는 것은 문제다. “임기 중 증세는 없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은 깨졌다. 그렇다면 이제는 복지를 위해 누가 얼마를 부담할지를 정해야 한다. 소득세ㆍ법인세 등 대기업과 부자들이 받아 온 감세 혜택은 어떻게 할 것인지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복지와 조세의 수준은 국민대타협위원회를 통해서 여론을 수렴해 결정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대로 하면 된다.”
-피케티, 한국의 선택을 묻는다(중앙일보 기명 칼럼ㆍ이하경 논설주간) ☞ 전문 보기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킨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한국어판이 지난 주말 서점에 깔렸다. (…) 피케티의 책은 방대하고 까다롭지만 결론은 어렵지 않다.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300년 동안의 데이터를 분석해 소득이 소수 엘리트에 집중되는 현상을 밝히고 지금의 자본주의를 ‘21세기 세습 자본주의’라고 정의했다. 노력보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편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런 분석은 세계 주류 경제학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경제발전의 어느 단계를 지나면 불평등이 축소된다는 쿠즈네츠의 유명한 ‘역 유(U)자 가설’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 우파 주류 경제학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불평등이 오히려 혁신의 원동력이 될 수 있고, 불평등을 해소하면 생산의욕을 잃는다고 주장한다. ‘불평등 필요악’에 가깝다. 길게 설명들 하지만, 사실 ‘불평등은 불가피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 게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고, 쉽게 구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자고 하지 않았다. 다만, 불로소득에 집중하며 부자들한테서 세금을 더 걷자고 제안한다. 누진적인 자본세를 만들어 불평등의 악순환을 피하자고 했다. (…) 자본주의를 제대로 경영하자는 제안이니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우파에선 박수치고 좌파들이 펄쩍뛰어야 할 얘기다. (…) 젊은 외국 경제학자가 내놓은 경제불평등 이론을 놓고 우리나라의 이데올로그 격인 좌우파 거목들이 벌일 격론을 생각하니, 한편 씁쓸하지만 기대도 크다. 며칠 뒤 우리나라에 온다는 피케티도 이런 현상을 환영할지 모른다. ‘정치경제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돈 많은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며 특히 시민이 돈과 관련된 사안들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불평등을 완화하려면 시민이 정치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소리다. 가진 자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피케티가 두려운가(9월 15일자 한겨레 ‘한겨레 프리즘’ㆍ이유진 문화부 기자) ☞ 전문 보기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숨이 턱에 닿게들 뛰고 있다. 연료는 불안이다. 극단적 불평등이 경쟁을 사투로 만든다. 둘러봐도 돌아봐서도 안 된다. 능력은 물신이 됐다. 성찰은 사라졌다.
“노트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열 때마다 근 열흘째 ‘업데이트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있다. (…) 지금껏 별 불편 없었고, 섣불리 그런 제안에 응했다가 낯설어진 사용환경에 곤욕을 치른 경험도 있는 터여서 나는 매번 거절 항목을 클릭한다. (…) 찬찬히 질문 내용을 다시 읽다가 문득 든 생각. ‘지금 업데이트하라는 게 실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나 아닐까.’편의로 가장한 시스템 로열티의 요구. 따르지 않겠다면 따라오지 말라는 청유의 형식을 띤 완곡한 명령 혹은 탈락과 배제의 엄포. 한동안은 버티겠지만 조만간 프로그램이 원하는 바에 순응할 공산이 크다. SNS 서비스를 소극적으로나마 들여다보게 된 것도 그와 유사한 과정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 그 느린 수동성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나는 SNS에 꽤나 중독돼 뉴스를 비롯한 요긴한 소식과 정보를 얻곤 한다. 어쩌면 컴퓨터가 권하는 저 프로그램의 업데이트도 내게 유익한 뭔가를 줄 가능성이 높다. 필요에 부응하고 때로는 앞지르기도 해야 프로그램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고 보면 SNS에서 내가 추종하는 이들도 대부분 나와는 상반된 유형의 이용자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적극적이고 자발적이고 또 저돌적이다. 그리고 대체로 기민하다. 한 마디로 경쟁력이 있다. 몇 년 전 이맘때 어느 밤 서울 불광동 오르막 찻길에서 리어카를 본 적이 있다. (…) 붐비는 시간대가 아니어서 그날 남자가 끌고 여자가 미는 리어카의 속도가 차선의 흐름을 방해하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동네를 누비다 보면 다급하고 난처한 경우도 겪을 것이다. 어쩌다 업데이트하지 못한 생계의 처방이 경제속도 60km의 도로 위에서 난폭하게 휘둘리는 상상. 나를 비롯한 누군가의 어떤 처지를 그 리어카나 리어카 부부에게 투사해 (자기)연민에 젖어들 때도 있다. 뒤처지면 죽는다는 불안감에 모두가 업데이트를 서두르고, 그렇게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기 바빠 개인이 점점 고립되고 있다고 한다. (…) 연민과 공감, 유대의 광장을 이야기하지만, 돌아서면 나부터 너무 늦지 않게 뭔가를 업데이트하고 또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자녀 교육서부터 취업, 재테크, 하다못해 습관이라도 좀 더 경쟁력 있게. 미시적 삶에서 그렇게 알게 모르게, 배제와 탈락의 기획에 아금바르게 부역하면서 아주 가끔 리어카와 나란히 느리게 걷는 일.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제 할 말 하기에도 바빠진 세상에서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그러니 어쩌잔 말이냐는 반문 앞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업데이트 하시겠습니까(한국일보 ‘편집국에서’ㆍ최윤필 선임기자) ☞ 전문 보기
“자식을 잃고 곡기마저 끊은 사람들 앞에서 피자와 햄버거를 씹으며 ‘폭식투쟁’을 벌인 무리가 있었다. 단지 몰지각한 행동을 넘어선, 가학적 폭력이었다. 많은 이들이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런 짓을 일종의 유희로 즐기고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 일본의 신흥 극우단체 재특회를 수년간 추적ㆍ기록해온 야스다 고이치는 재특회 회원들이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나 일베의 구성원들 또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일베를 포함한 넷우익 다수도 사회 전체에서 보면 약자이다. 즉, 지금 벌어지는 일은 ‘약자의 약자를 향한 증오’의 산물이다. (…) 왜 약자가 약자에게 (공감은커녕) 증오와 혐오를 퍼붓는가? (…) 여기서 핵심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증오와 폭력이 점점 확산되는 현상의 사회적 배경이다. ‘약자를 혐오하는 약자’의 심층 동기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강자 선망’과 ‘피해자 되기’다. ‘강자 선망’은 강자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이면서 동시에 약자와 자신의 분리다. (…) ‘피해자 되기’는 쉽게 말해 ‘무능한 너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본다’는 인식이다. 넷우익, 군대폭력, 다른 나라 극우담론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이 피해자 서사는 약자를 향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탁월하게 작동한다. 이 논리회로 속에서는, 약자·소수자를 위한 손톱만 한 사회적 배려와 혜택조차 약자·소수자가 내 몫을 부당하게 착복하는 가해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단죄된다. (…) 능력주의(meritocracy)는 말 그대로 ‘능력에 따른 지배’로서, 능력에 따른 보상의 차등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당연시한다. ‘강자 선망’과 ‘피해자 되기’는 능력에 따른 차등대우에 찬성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와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본 인식이 허물어져 있다는 점이다. 평등의 토대가 무너진 능력주의, 그것은 타락한 능력주의이며 스스럼없이 인종주의와 흘레붙는 능력주의다.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는 추앙해 마땅하다. 하지만 약하고 못난 존재는 벌레 취급을 해도 좋다!’”
-타락한 능력주의(9월 16일자 한겨레 ‘야! 한국사회’ㆍ박권일 칼럼니스트)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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