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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9ㆍ11 진상 규명의 교훈

입력
2014.09.0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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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국제부장

9ㆍ11 진상 규명 과정에서 유가족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 대표격으로 9ㆍ11 진상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유족 대표로 증언한 크리스틴 브릿와이저를 꼽는다.

브릿와이저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압박해 진상조사위를 출범시키고 결국 부시까지 청문회에 세운 주역이다. 하지만 그는 공화당이라면 사사건건 반대하는 골수 민주당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로스쿨을 졸업하고 얼마 뒤 만난 남편을 따라 공화당원이 됐고, 그 남편이 ‘걸레’라고 비난했던 뉴욕타임스의 구독도 끊었다. 2000년 대선 때는 부시에 한 표를 행사했다. 공화당을 지지하게는 됐지만 그렇다고 정치에 유별나게 관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안 일 챙기고 아이 키우는데 열심인 가정주부였다.

여러 인터뷰에서 그는 진상 조사의 필요성을 9ㆍ11 당시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동화를 읽어 주던 부시가 사건 보고를 받고도 25분간 그 동화를 마저 읽었다는데 충격받았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국가 재난에 대한 지도자의 무감각에 놀란 것이다.

테러 이전에 무수한 경고들이 있었음에도 왜 막지 못했는지, 그때 지도자는 무엇을 했는지 등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브릿와이저의 노력에 대해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은 당시 갖은 비난을 퍼부었다. ‘불평꾼’이라거나 ‘히스테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보수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칼럼으로 ‘9ㆍ11 미망인들에게 미국인들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며 그들을 말썽꾼 취급했다. 한 보수 평론가는 그들을 유명인 된 것을 즐기는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들로 비난했다. 남편의 죽음을 즐기는 마녀이고 괴물이라거나, 부시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저주하는 ‘극좌 창녀’라는 망언까지 등장했다.

9ㆍ11 진상조사 과정에서 이 같은 역할과 대중적인 인지도 때문에 매년 사건 발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브릿와이저는 주목받았다. 특히 10주년을 맞은 2011년에는 여러 외신들이 인터뷰를 했다.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는 두 차례 공직에 나서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다. 선거에 나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받으면 빚을 지는 셈이라는 이유에서다. 유가족들의 진상 규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또 다른 테러를 막는데 사실상 실패했다고 보는 그는 미국의 정치가 심지어 시민의 안전까지 담보로 해서 이익을 챙기는 체제라는 점을 이유의 하나로 들었다. 그런 체제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대신 그는 허핑턴포스트에 관심 분야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그가 올린 글들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중동, 아프리카 등 이슬람국가에 대한 글이 많다. 글 제목을 읽어가다 2011년 5월 2일에 눈이 멎었다. 9ㆍ11 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 소식이 전해진 날이다. 브릿와이저는 이날 ‘내 남편을 위한 정의’라는 글에서 9ㆍ11 이후 10년 가까이 끌어온 테러와의 전쟁이 마침표를 찍었다며 안도를 표시했다.

그런데 약 네 시간 뒤 이보다 좀더 긴 ‘내게 오늘은 축복할 날이 아니다’라는 글이 올라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남편이 죽던 날 TV 화면에서 불타는 무역센터 빌딩과 거리에서 환호하는 아랍 청년들을 교차해 보여 주는 것을 보며 믿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빈 라덴의 죽음으로 우리가 승리했다고 할 때 그 과정에서 수반된 여러 피해들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을 이었다. 미국인, 이라크인 등 목숨을 잃은 수천명과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과 지금도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많은 젊은 미국 청년들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 현기증을 느꼈던 건 그날 아침 거리에서 환호하는 미국 군중들의 모습이었다. 자신은 수천명의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전쟁도, 정의를 증명하기 위해 피를 묻히는 일도, 총알자국 투성이의 시신을 바다로 내던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악인이더라도 한 사람의 죽음을 젊은 사람들이 환영해 마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라며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교훈을 얻지 않았나’고 물었다.

브릿와이저의 행동과 성찰을 되짚으며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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