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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절박함과 깜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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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ㆍ30 재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 날이었던 지난달 17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선 한 차례 ‘쇼’가 벌어졌다. 40~50대 국회의원 4명이 미키마우스가 연상되는 빨간색 모자에 흰색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김무성 대표와 이완구 원내대표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장대소했다.
이들 4명의 국회의원이 뒤로 돌아섰다. 그들의 등에는 궁서체 정자가 한글자씩 쓰여 있었다. ‘혁ㆍ신ㆍ작ㆍ렬’. 선거 유니폼을 선보이면서 내친김에 이번 선거에 임하는 새누리당의 컨셉트를 함께 알린 것이다. 새누리당이 2030 세대와의 소통 창구로 활용하는 이준석씨가 혁신위원회를 이끌던 상황이었으니 맥락의 일관성은 뚜렷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앞세워 읍소하던 6ㆍ4 지방선거와는 달리 ‘혁신’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새롭게 바꾸겠다’ 혹은 ‘새롭게 바뀌겠다’는 정치권의 약속을 곧이 곧대로 믿을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닳고 닳은 뱃지들이 즐비한 새누리당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혁신 퍼포먼스에 나섰던 한 의원조차 “당직만 맡고 있지 않았어도 그런 낯뜨거운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 4명은 선거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과 제1사무부총장, 그리고 남녀 대변인이었다.
나중에 선거를 코 앞에 두고는 60대인 김무성 대표도 반바지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지원유세를 다녔다. 그는 얼마 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젊은 의원들이 반바지 입고 나설 때 ‘저놈들 참 용기 있네’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막상 제안을 받았을 땐 ‘너 미쳤냐’고 했다. ‘주책 떤다’거나 ‘쇼 한다’는 얘기 들을 게 뻔하지 않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부터 혁신하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했더라.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고 나부터 좀 가벼워지자고 생각했다. 막상 입었더니 시원하고 좋더라.”
사실 재보선 압승 이후 새누리당의 혁신 행보는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시간만 나면 혁신을 외치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는 알 길이 없다. 심지어 혁신위는 여전히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표를 얻기 위한 ‘생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굳이 따지자면 ‘예측 가능한 정치’의 한 단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새누리당을 욕하고 손가락질만 할 수 있을까. 뻔히 알면서도 속는 유권자들의 수준이 문제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와 잇따른 인사 논란으로 인해 당초 새누리당의 목표는 이기는 게 아니라 덜 지는 것이었다. 과반의석이 무너지면 박근혜 정부의 성공은 물론 20대 총선도 어려울 것이란 위기감이 컸다. 그래서 절박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이 4060 뱃지들로 하여금 부끄러움과 비아냥과 두려움을 물리치게 했다.
결코 새누리당이 옳았다는 게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바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너무나 평범한 얘기를 반복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과감하게 고정관념을 깰 수 있는 용기는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혁신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지금의 새누리당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비난받아야 한다.
여기서 잠깐, 새정치민주연합이었다면 어땠을까. 이기기 위해서, 아니 덜 지기 위해서 반바지에 밀집모자를 쓸 수 있었을까. 꽤 오랜 기간 지켜봐 온, 순전히 개인적인 감에 따르자면 본인 선거가 아니었으니 100% 불가능했다. “꼭 그런 쇼를 해야 하는 거냐”는 불만이, “그런 식으로 표를 구걸하는 건 옳지 않다”는 비판이 압도했을 거다.
‘깜냥’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엔 ‘어떤 일을 가늠해보아 해낼 만한 능력’이라는 뜻풀이가 적혀 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감히’ 대변하겠다면, 국민의 뜻을 받들어 ‘감히’ 국가를 운영하겠다면 자기 자신의 깜냥부터 가늠해볼 일이다. 만약 깜냥이 안된다면 최소한 절박함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니 절체절명의 선거를 앞두고 한 줌도 안되는 계파들끼리 죽기살기로 싸우고 견제하다가 엉뚱한 곳에서 사단을 내는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세월호특별법의 오늘은 깜냥이 되지 않는데 절박함조차 없는 야당을 둔, 안타깝지만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양정대 정치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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