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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멀리서 뵙는 것만으로 치유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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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말기 환자·불교 신자·세월호 유족
"교황, 멀리서 뵙는 것만으로 치유받아"
80만명 몰린 시복미사 끝나자
현장 말끔히…시민의식도 빛나
복막암 말기 환자인 이정현(61ㆍ여)씨는 16일 오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한국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미사’를 서울 광화문광장 행사장 밖에서 지켜봤다. 그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이날 미사에 초대받지 못했다. 3주 전 미사 참가 신청기간에 수술을 받느라 성당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술 부위가 다 아물지 않아 복대를 하고 항암치료로 빠진 머리를 흰색 벙거지로 가린 그는 무대에서 150여m 떨어진 곳에서 교황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도 시종일관 기쁜 표정이었다.
이씨는 올해 2월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왔다. 이씨는 병세가 빠르게 악화돼 체념하던 중 자녀들이 강권해 수술을 받았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받은 수술은 놀랍게도 성공적이었다. “교황님을 뵙고 두 번째 인생을 선물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었어요. 비록 미사에 참석하진 못하지만, 절망이 사라진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이날 미사장은 ‘빈자의 벗’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정식으로 초대받아 미사에 참석한 신자 수만 17만5,000명(경찰추산), 초대를 받지 못했지만 교황을 만나기 위해 62만여명이 광화문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행사장을 둘러싼 보호벽 밖으로 늘어섰다. 25년 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났던 손진희(39ㆍ여)씨는 아들 이태현(11)군과 교황을 다시 찾았다. 손씨는 “아들이 교황님과의 만남을 통해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배운 것 같아 흐뭇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유족, 이주노동자, 환자 등 소외 받고 힘없는 이들도 교황을 만나 희망을 찾았다. 필리핀에서 온 이주노동자 알빈(36)씨는 “1년 넘도록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교황님을 만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낯선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교황님을 만날 기회를 준 한국이 이제 제2의 고향이 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를 탄 현식렬(57)씨는 “아내도 정신지체를 앓고 있다. 교황님을 뵙고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로 딸 예지양을 잃은 박상우(41)씨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약자를 돌보는 교황님의 자세를 본받기 바란다”고 힘줘 말했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을 각별히 배려해야 한다”는 교황의 진심은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울리기 충분했다. 불교 신자인 이정애(65ㆍ여)씨는 “약자를 감싸는 교황님의 모습에 감동받아 꼭 한 번 뵙고 싶었다”면서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이곳에 온 것으로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종교를 믿지 않는 마성현(19ㆍ대학생)씨는 “대부분 종교들이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작정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서 종교가 평화와 사랑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신을 믿지 않아도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황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팬이 됐다. 그를 멀리서나마 직접 보고 싶어 세종로를 찾았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이날 오전 9시쯤 서소문성지 참배를 시작으로 세종로 카퍼레이드, 시복미사에서 80여만명을 만났다. 오전 2시부터 자리를 잡기 위해 몰려든 청중은 교황을 기다리느라 지칠 법도 했지만 밝은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비바 엘 파파! 교황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환호했다. 교황은 다가서는 시민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눈을 맞추고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교황은 또 수많은 사람들의 이마에 손을 얹어 강복(복을 내림)하고 어린이 26명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축복한 뒤 시복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2시간 넘게 진행된 미사에서 “한국 천주교가 가진 순교자의 유산이 이 나라와 온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미사에 참석한 솔레이만 디아즈(41ㆍ브라질)씨는 “교황께서 시복미사를 통해 천주교인뿐 아니라 고통 받는 많은 이들을 위로하셨다고 생각한다”며 “좁게는 한국인들을 위로한 것이지만 TV 중계를 시청한 세계인들도 큰 감동과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사가 낮 12시쯤 종료된 후 80만 인파는 약 2시간 30분만에 질서정연하게 퇴장했다. 덕분에 주변도로 교통통제가 예정보다 1시간 30분 빠른 오후 3시 30분에 모두 해제됐다. 참가자들이 쓰레기를 되가져가는 등 시민의식도 빛났다. 한 환경미화원은 “광화문 광장 양쪽 골목과 간이 화장실 주변에 쓰레기 더미가 쌓였지만, 수십만 명이 다녀간 것을 감안하면 쓰레기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김관진기자 spirit@hk.co.kr
정준호기자 junhoj@hk.co.kr
김민정기자 mjkim@hk.co.kr
김진주기자 pearlkim@hk.co.kr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일정 따라잡기]
☞ 첫 날① 프란치스코 교황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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