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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가 된 '잔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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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수 없군. 보혁이 함께 혀를 찬다. 야당과 박영선을 보면서다. 진보도 마초인 정치판에선 여성 한계가 뚜렷하단 게 우파 조소. 좌파는 기득권 허수아비로 전락한 잔다르크가 아쉽다.
“2012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정계 은퇴한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능력이 출중해도 남자처럼 세(勢)를 만들지 못하고 낙도(落島) 정치를 하는 게 여성 의원의 한계”라고 고백했다. 지난 7ㆍ30 재ㆍ보선에서 신승(辛勝)을 거두며 국회로 돌아온 나경원 의원 또한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를 회상하며 비슷한 얘기를 했다. (…) 여야를 막론하고 여성 의원은 희생양쯤으로 이용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박영선 의원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법제사법위원장 시절 워낙 강성으로 이름을 떨쳤던 여인이다. (…) 최초의 여성 원내대표가 됐을 땐 여성 대통령에 이은 쾌거로 반기는 사람이 많았다. (…) 한결 부드러워진 박영선 리더십은 빛을 보는 듯했다. 재ㆍ보선 참패 후 박 원내대표는 투쟁 일변도였던 야당 체질을 ‘생활정치’로 바꿔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첫 작품이 ‘세월호 특별법’의 대승적 합의였다. 문제는 박영선을 흔드는 세력이었다. 침몰하는 새정치연합호(號)를 물 밖으로 끌어내려는 그의 발목을 붙든 건 정치적 우군인 당내 강경파였다. 그는 “법을 통과시켜 진상조사위원회를 가동시키는 게 우선”이라며 버텼지만 결국 조직의 세(勢)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환골탈태한 야당을 보여주지 못한 채 주저앉은 그는 “세월호법 재협상 책임은 새누리당에 있다”는 언사로 우리를 다시 슬프게 했다. 처음부터 원내대표 사퇴를 배수진으로 치고 합의안을 밀어붙였다면 어땠을까. 구태를 벗지 못한 강경파와 절연하고 초ㆍ재선 의원을 악착같이 설득했다면 어땠을까. 재협상으로 결론 났을 때 미련 없이 원내대표직을 던졌다면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욕심을 버린 통 큰 정치인으로 각인되지 않았을까.”
-박영선을 위한 辨明(조선일보 ‘데스크에서’ㆍ김윤덕 문화부 차장) ☞ 전문 보기
“전혀 ‘민주당스럽지’ 않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체질상 평소라면 ‘박영선 사퇴’ 연판장을 돌리고 남았을 텐데 조용하다. 새정치연합 의원총회가 박영선 비대위원장이 밀어붙인 세월호특별법을 거부하고 재협상을 요구하면서도 “박영선 중심으로 단결”을 결의했다. (…) 새누리당 지도부는 합의를 깬 적장을 비난하기는커녕 “박영선 리더십이 회복돼야 한다”고 성원한다. 여하튼 진상조사위의 조사권 문제는 풀리지 않을 ‘세월호특별법’의 총대를 멜 야당의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박영선 비대위 체제’는 ‘김무성 결단’이 나와야 살 수 있게 됐다. 적대적 공생이다. 7ㆍ30 재ㆍ보선 참패의 위기를 모면하려 출범시킨 ‘박영선 비대위 체제’가 초장에 흔들리면 ‘2등 기득권’이 밑동째 위협받는다. 바닥난 신뢰조차 떠나게 만든 세월호특별법 담합에도 불구, 계파의 본성마저 감추고 “단결”을 외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제1야당의 울타리만 지키고 있으면 정권은 못 잡아도 금배지는 계속 달 수 있다. 20대 총선은 박근혜 정부 말기에 치러져 야당에 유리하다. (…) 박영선의 비대위원장 취임 일성은 ‘투쟁 정당’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한데 새정치연합은 투쟁다운 투쟁을 한 적이 없다. 정부ㆍ여당의 실정을 견제하는 데서, 가난한 사람과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입법에서 대안도 투쟁도 보여주지 못했다. (…) 세월호 참사에 분노하는 국민, 슬픔에 빠진 유가족과 손잡지도 못하면서 구호로만 ‘세월호 심판론’을 외쳐댔으니 거꾸로 심판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집권당이 아니에요. 우리는 과반 의석을 갖고 있지 않아요.” 세월호특별법 협상에서 굴복한 박영선의 수비용어다. 새정치연합은 사상 최대인 130석을 가진 야당이다. (…) 김대중 평민당이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공룡 여당을 상대로 지방자치제를 관철시킬 때 의석은 71석에 불과하다. 박근혜 한나라당이 57일간 장외투쟁을 벌여 과반여당의 사학법 개정을 좌초시킬 때 의석은 121석이다. (…) 의석으로만 정치를 한다면 야당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야당의 정치는 국민의 지지를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사학법과는 비교되지 않는 국민적 일체감이 형성된 세월호특별법이다. 박영선은 “견고한 새누리당 벽”을 한번 제대로 들이받지도 않은 채 백기를 들었다. (…) 새정치연합은 선거에서 패배했더라도 다시 이기려는 의지, 열심히 싸우려는 열정이라도 보여야 완전히 떠난 지지자들을 돌릴 수 있다.”
-‘김무성 결단’에 매달린 ‘박영선 운명’(8월 15일자 경향신문 기명 칼럼ㆍ양권모 논설위원) ☞ 전문 보기
우파는 개인의 힘을 중시한다. 실천을 핵심 동인으로 본다. 반면 좌파가 주목하는 건 구조. 시스템이 행위를 제약한단 설명이다. 온통 개혁파 교황 얘기다. 한데, 맥락 지적은 드물다.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힘은 ‘누구처럼’ 말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힘은 예수를 본받아 예수와 똑같이 살아가겠다는 결심과 행동에서 우러나는 힘이다. 교황은 “우리는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가 돼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교황의)권한이 허락하는 모든 걸 하겠다”고도 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교황 스스로가 이 꿈을 ‘겸손한 야심(野心)’이라고 했다. (…) 돕는 사람의 빨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얀 옷에 얼룩이 지지 않도록 조심조심한다는 사람. (…) 이 ‘평범(平凡) 교황’이 자신이 본받고 섬기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교회’라는 이상을 위해 당시의 기득권 세력인 교황과 교계(敎界) 지도층과 협상하고 타협했던 역사까지 거론하는 걸 보면 예사 결심이 아닌 게 확실하다. (…) ‘예수님처럼 부처님처럼’ 말하는 걸 넘어서서 ‘예수와 같이 부처와 같이’ 우리 곁에 사시던 분들의 기억이 아스라해져 가는 오늘이다.”
-한없이 낮추는 교황의 더없이 큰 野心(조선일보 기명 칼럼ㆍ강천석 논설고문) ☞ 전문 보기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찬사가 많다. 자본주의의 사악함을 비판하는 등 그의 발언과 행보는 충분히 그럴 만해 보인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한 인물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 꼴통’이라 비판받는 염수정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의 추기경 임명에서 드러나듯 교황은 로마 가톨릭 체제라는 정치적 컨텍스트 안에서 작동하는 존재다. 인물보다는 그 개혁성 자체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걸 이끌어낸 요한 23세 교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교회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인 책임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 변화가 남미의 해방신학 운동을 비롯, 가난하고 약한 인민들과 함께하는 교회에 힘을 실어준 건 물론이다. 한국의 정의구현사제단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교리의 면에서 혁신은 ‘교회 밖의 구원’을 인정한 것이다.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면, 다른 종교를 믿거나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의 사람들은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이런 논리가 얼마나 많은 야만과 제국주의 수탈의 빌미가 되었던가. (…) 자본주의의 사악함을 비판하는 교황은 괜스레, 우연찮게 출현한 게 아니다. 가톨릭의 개혁 정신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서 잦아들었고 앞서 언급한 베네딕토 16세 시기엔 ‘제3차 바티칸 공의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 여론이 결국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교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느님을 살해하는 신도들(4월 8일자 경향신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ㆍ‘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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