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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세월호 유족에 세례한다… 나무 십자가는 바티칸으로

입력
2014.08.1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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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주의 유혹과 무한경쟁에 맞서 싸우고 죽음의 문화 배척해야” 미사에서 강조

15일 오전 대전 월드컵경기장엣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5일 오전 대전 월드컵경기장엣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눈물도 마른 부모들이 38일간 지고 걸었던 나무 십자가가 교황과 함께 바티칸으로 간다. 참사의 비극과 억울함을 기억해달라며 전한 노란 리본은 교황의 가슴에 달렸다. 아들을 잃었으되 보내지 못한 아버지는 교황의 세례를 받게 됐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들의 슬픔을 온전히 품은 듯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세월호 참사 유가족 및 생존 학생들의 만남은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직전 이뤄졌다. 교황을 만난 사람은 세월호 유가족대책위원장인 김병권(고 김빛나라양 아버지)씨, 부위원장 김형기(고 김해화양 아버지)씨 등 유가족 8명과 경기 안산시 단원고 생존학생 2명이었다. 이 중 김학일(고 김흥기군 아버지)씨와 이호진(고 이승현군 아버지)씨는 6㎏짜리 십자가를 메고 단원고에서 진도 팽목항을 거쳐 대전까지 900㎞를 걸어왔다.

교황은 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했다. 대화 내내 눈을 마주치며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교황의 따뜻한 손길에 일부 가족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교황은 십자가를 메고 도보순례를 한 이호진씨가 한 세례 요청을 받아들이는 파격적인 결정도 했다. 이씨는 “가톨릭 신자이나 아직 세례를 받지 못했고, 세월호 참사 후에는 슬픔을 잊기 위해 도보 순례를 하게 됐다”면서 간곡하게 부탁했다. 교황청 대변인인 롬바르디 신부는 “처음 듣는 청이라 교황이 조금 놀랐지만, 수락했다”며 “교황은 영적으로 유가족의 고통과 아픔을 공유할 뿐 아니라 방한 중 세례를 직접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16일 오전 시복식 전 궁정동 주한 교황청대사관에서 세례식을 할 예정이다. 교황이 특정 개인에게 세례를 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가족들이 교황에게 전한 것은 억울함이었다. 참사 122일이 지나도록 진상 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현실 때문이다. 김병권씨는 “교황에게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아픔이 치유되도록 정부와 국회에 어서 법을 제정하라고 말해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가족들은 이를 편지로도 적어 교황에게 전달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가 10명 있으니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것도 유족이 교황에게 전한 부탁이다. 유족들에 따르면 교황은 시복식 때 단식농성 중인 김유민양의 아버지를 만나면 꼭 한번 안아달라는 얘기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족들은 교황에게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기억해 달라는 뜻의 노란 리본과 배지, 팔찌, 희생자들의 모습이 담긴 앨범을 전달했다. 38일 간 전국을 돌았던 나무 십자가도 선사했다. 교황은 이를 모두 바티칸에 가져가기로 했다.

15분 간의 짧은 면담이었지만 유족들은 큰 위안을 받았다. 김병권씨는 “교황께서 미사에 노란 리본 배지를 달고 나온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며 “많이 힘들고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우리 마음을 받아주셨다는 느낌이 들어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제의 위에 노란 리본을 달고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집전한 교황은 삼종기도를 통해 “세월호 침몰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주님의 평화 안에 맞아주시고, 울고 있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며 형제자매들을 도우려고 기꺼이 나선 이들을 계속 격려해 주시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또 “대한민국의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을 맞아 이 고상한 나라와 그 국민을 지켜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께 간구한다”고 했다. 이날 미사에는 유가족, 생존학생 등 36명, 천주교 신자, 시민 등 5만 여명이 참석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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