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강군의 길

입력
2014.08.1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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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조선족 취업사기 실태를 취재하러 중국 동북3성을 갔을 때 봤던 북중 접경 지역의 중공군은 허름한 차림에 절도도 있어 보이지 않았다. 동행했던 조선족 안내인에게 한때는 반쯤 죽은 걸로 생각하고 군대 갔지만 많이 나아졌다며 우리 군대문화를 얘기했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공군 내에서 상하 간에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기자는 괜한 소리로 여겼다. 군기와 위계질서를 잡기 위한 물리적 행사는 군대라는 특수집단 어디에서나 일반적일 걸로 생각했다. 마음 속으로 후진적인 중공군은 더했으면 더했지 했다.

기자가 몰라서 그렇지 중공군의 군율은 역사가 깊다. 마오쩌둥이 1920년대 홍군 시절 제정한 ‘3대 기강, 8항 주의(注意)’다. 3대 기율은 ▦모든 행동은 명령에 따라야 하고 ▦대중의 실오라기 하나 취하지 않으며 ▦모든 전리품은 공유한다는 내용이다. 8항 주의는 ‘병사를 구타하지 않는다’는 게 그 첫 번째다. 말을 부드럽게 한다거나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빌린 것은 반드시 돌려준다는 등이다. 민간인 약탈과 부녀자 겁탈이 횡행했던 6ㆍ25전쟁 시기 중공군은 어느 군대보다 민폐(民弊)를 끼치지 않은 걸로 기억하는 이북 피난민들이 많다. 당시 중공군의 예하부대 지시 사항을 보면 ‘인민대중의 풍습과 습관을 존중하지 않고 그르치는 병사는 반드시 조사해 배상하고, 사과하며 늘 기율이 좋고 나쁜 부대단위를 공표해야 한다’중공군의 한국전쟁ㆍ박실 저고 돼 있다.

홍군이 국공내전과 제국주의 일본군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천도 중국 인민의 마음을 산 강한 군율에 있었을 것이다. 소총과 수류탄, 박격포 따위의 조잡한 개인화기로 무장한 중공군이 6ㆍ25전쟁에서 막강한 화력의 유엔군을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도 딴 데 있지 않다. 반면 한국군은 중공군의 주 타깃이었다. 지휘 능력이나 장비, 병사의 사기도 바닥인 한국군을 공격 목표로 삼아 미군을 분산 고립시키는 전략이다. 갓 태어난 한국군은 지휘나 훈련, 군 기강 등 모든 면에서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었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3차 공세에 동부전선의 한국군 3군단이 혼비백산해 후방으로 70㎞를 무질서하게 도주하다 예하 병력의 40%만 살아남은 현리 전투는 한국군 실상을 온전히 드러낸다. 사병은 물론 모든 지휘관이 지휘를 포기한 채 계급장을 떼고 도망갔다. 당시 밴 플리트 유엔군 사령관이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을 해체하고,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미군에 넘겼다. 지금까지도 한미간 이슈가 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의 계기가 된 사건이다.

오늘날의 반인권적 군대문화는 6ㆍ25전쟁 시기 오합지졸 군대의 폐습이 60년 이상 이어져온 결과로 기자는 해석한다. 군은 말로는 구타 근절을 되뇌지만 은근히 방조해온 결과가 지금까지도 윤 일병 구타사망 등 군기문란 사건을 계속 초래하고 있다고 본다. 폭력으로 부하, 사병의 기강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잠재적 사고, 한국군의 단독 작전지휘권으로는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사고가 모두 6ㆍ25전쟁 시기 한국군 수뇌부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한다. 군단 해체와 지휘권 박탈의 치욕을 겪었던 그 3군단장이 노무현 정권 당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의 주역 역할을 했던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오늘날 우리 군은 우수한 화력과 최첨단 무기를 갖춘 군대로 거듭나고 있다. 하지만 그걸로는 절대 강군이 될 수 없다. 우리 군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군대로 거듭나기 위해 뜯어고쳐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정신의 문제, 특히 우리 군의 자학적 사관이다. 전작권 환수 반대의 최대 세력이 퇴역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라는 게 그 방증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환경에 미국이라는 좋은 동맹을 가진 것은 우리의 큰 무기다. 하지만 동맹에 매달려서는 결코 강한 군대, 강한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독자적인 전쟁수행 능력, 작전 능력이 아직은 안 된다는 우리 군의 인식과 전근대적인 군대문화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관계에 있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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