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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관동대학살… 유족들 "서러운 세월만 흘러"

입력
2014.08.1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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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대지진 후 조선인 집단살해

정부 무관심 속 사망 집계조차 안 돼

올해 4월 진상규명 법안 발의 불구

외통위로 넘어가 장기표류 가능성

간토대지진 학살 피해자 김광진씨의 이름이 기재된 ‘일본 진재시 피살자 명부’ 사본. 1953년 이승만 정부가 한일협상에 대비해 작성한 이 명부에는 조선인 피살자들의 이름, 출신지, 학살 경위 등이 적혀 있다. 유가족 제공
간토대지진 학살 피해자 김광진씨의 이름이 기재된 ‘일본 진재시 피살자 명부’ 사본. 1953년 이승만 정부가 한일협상에 대비해 작성한 이 명부에는 조선인 피살자들의 이름, 출신지, 학살 경위 등이 적혀 있다. 유가족 제공

‘일본 정부의 만행에 의해 학살당함.’(한양 조씨 남원공파 제주세보)

2007년 세상을 떠난 제주 출신 조태만(사망 당시 86세)씨가 1965년 3월 족보에 직접 기록한 내용이다. 여기에 나온 ‘일본 정부의 만행’은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關東) 대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말한다.

조씨는 생전 일본 도쿄에 살던 7촌 할아버지 조묘송(당시 32세)씨 가족 5명이 관동 대지진 직후 민심 동요를 우려한 일본 정부가 퍼뜨린 유언비어로 한날 몰살당했다고 확신하고, 이들의 유해를 수습하려 63년 처음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건 언급 자체를 꺼린 재일 조선인들을 보면서 ‘뭔가 있구나’싶어 추적을 멈출 수 없었다. 조씨는 2년 간 네 차례나 제주와 일본을 오간 끝에 일본 모슬포 비행장 신축장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육촌 인척이 소개한 일본군 장교로부터 학살 사건의 전모를 들을 수 있었다.

조씨가 들은 얘기는 올해 1월 발견한 최승만씨의 회고록 ‘극웅필경’에 나온 조묘송 일가 사망기록과 정확히 일치했다. 최씨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동포 위문반’일원으로 일본 각지를 돌며 생존 조선인 등을 상대로 사건의 내막을 캤던 사람이다. 기록 속 일가족은 지진 발생 이틀 뒤 도쿄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일본군에게 칼로 무참히 살해됐다. 일본군은 만삭인 조묘송씨 아내 문무연(당시 38세)씨의 배를 갈랐고, 태아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조씨는 조상의 죽음만 확인했을 뿐, 이후 진실은 파헤치지 못한 채 2007년 세상을 등졌다.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맞은 조선인만 최소 6,000명이 넘는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91년째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유족들의 가슴은 타 들어가고 있다. 정부가 일본에 진상조사를 요청한 것은 지진이 일어난 해 상해임시정부 차원의 진상 요구가 유일하다. 진상규명은커녕 피해 규모조차 파악이 안 됐다. 관동 대학살 연구자인 강효숙 원광대 사회학과 강사는 “상해임시정부가 당시 추정한 인원은 6,661명이지만 독일 외무성 집계는 2만3,000여명”이라며 “현장 답사를 통해 실상부터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최근 강제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등 다른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에 대해 국내 법원이 잇따라 배상 판결을 내리는 것을 보면 더욱 힘이 빠진다. 국무총리 산하에 특별위원회를 두고 강점기 피해자들에게 5,662억원의 보상금을 지원한 것과도 크게 대비된다. 14일 만난 조태만씨 아들 민성(62)씨는 “매년 광복절이 찾아와도 유해도 못 찾고 있으니 비통한 마음 뿐”이라며 “관동대학살은 ‘잊혀진 진실’이 됐다”고 토로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진실 규명은 오롯이 유족의 몫이 됐다. 김대원(88)씨는 학살 당한 큰아버지 김광진(당시 31세)씨를 찾으려 1998년부터 청와대에 7차례나 진정을 넣었으나 매번 거절당하다 지난해 3월 세상을 떠났다. 큰아버지는 8개월 뒤 국가기록원이 주일 한국대사관 이전 과정에서 발견한 ‘일본 진재시(震災時) 피살자 명부’ 희생자 290명 중에 포함돼 기적적으로 생사가 확인됐다. 김씨의 며느리 한정덕(59)씨는 “아버님 뜻에 따라 실마리를 계속 풀어 가겠다”고 말했다.

김씨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관동대학살 피해자는 공식 기록과 증거가 거의 없지만 정부는 일본인들의 증언과 민간 자료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유족들의 마지막 끈인 진상규명 법안 처리도 지지부진해 상실감을 더하고 있다. 여야 의원 103명은 지난 4월 초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뒤늦게 발의했으나 법안은 돌연 안전행정위원회가 아닌 외교통일위원회에 회부됐다. “관동대학살은 입증 가능한 자료가 전부 일본에 있어 외교 사안”이라는 국회 의안과의 유권해석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관동대학살 법안은 다른 외교 현안과 맞물려 장기 계류될 가능성이 높다.

법안을 주도한 새정치민주연합 유기홍 의원은 “관동대학살 특별법의 핵심은 정부가 국무총리 직속으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돕는 것”이라며 “국내 자료 수집과 추모관 건립 등 지원사업을 추진하려면 법안이 마땅히 안행위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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