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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이라는 자기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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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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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불의가 이기는 게 세상 이치일 거다. 늘 양심은 실존을 거스른다. 사필귀정이란 예언은 예민한 이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편만한 긍정 이데올로기의 상징들은 현실 호도 용도다. 코언 형제의 블랙코미디 영화 ‘번 애프터 리딩’(2008)은 착각을 조소한다. 영화 속 장면. UPI코리아 제공
결국 불의가 이기는 게 세상 이치일 거다. 늘 양심은 실존을 거스른다. 사필귀정이란 예언은 예민한 이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편만한 긍정 이데올로기의 상징들은 현실 호도 용도다. 코언 형제의 블랙코미디 영화 ‘번 애프터 리딩’(2008)은 착각을 조소한다. 영화 속 장면. UPI코리아 제공

정의(正義) 관철이 진보다. 그러나 사필귀정보다 더 자연스러운 건 적자생존. 살아남는 건 불의다. 부조리를 견디려면 환각이 필요하다. 괜찮아, 잘될 거야. 마취가 주문의 효능이다.

“긍정적 자기기만이란 게 있다. ‘나’를 충분히 통제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게 그 예라고 한다. (…) ‘정의는 승리한다’는 믿음도 그런 걸 테다. (…) 공적 영역에서 어이없는 일들이 자고 나면 불거지고 있지만 과거보다는 나아졌고, 더디게나마 나아져갈 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나도 한 적이 있다. 근거를 대라면 논리가 아닌 사례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그 말도, 실은 희망이나 당위에 기댄 긍정적 자기기만이다. (…) 살인자가 지문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믹서기에 제 손을 넣는, 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끔찍해서 눈을 감아도 달라지는 건 없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손목에 붕대가 친친 감긴, 조금은 견딜만한 장면을 바라봐야 한다. 나는 우리가 눈감은 불의가 러셀이 말한 것처럼 세상 한 켠에 있다기보다 마음 한 켠에, 각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 나는 진화론만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없다고 생각한다. 윤모 일병의 내무반에서 일어난 일들, 그의 영혼과 육체를 학대한 선임병들과 그 학대를 방관하고 은폐했던 지휘관들의 내면에서 나는 그런 양상을 엿본다. 인간보다 군인을 앞세우고 인권보다 군인정신을 우선시하는 군 최고수뇌부의 그것은 분칠한 제노사이드의 신념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자사태는 어떤가. 늘어가는 억울한 희생들, 책임 있는 국제정치 주체들의 오연한 방관, 긴 세월 홀로코스트의 죄악을 앞세워 세계의 양심에 휴머니즘을 호소하던 저 수많은 반나치 유대 지식인들의 비겁한 침묵에서도, 진화론적으로 확장하는 저 불의의 경향을 본다. (…) 군이든 이스라엘이든 공인된 불의를 사후적으로, 그 인식을 공유한 무리 안에서, 성토하기란 쉽다. 불의와 선을 긋고 정의의 이름으로 무리 짓는 일. 그 유구한 패턴 위에서 이 사회가 진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거기 편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긍정적으로’ 나를 기만한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눈을 감으면 나는 기만으로 아늑해진다.”

-진화론, 디스토피아의 전망(한국일보 ‘편집국에서’ㆍ최윤필 선임기자) ☞ 전문 보기

“선임병들의 구타와 가혹행위 와중에 사망한 윤 일병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 윤 일병의 사망은 한국인들에게 ‘끔찍한 과거의 귀환’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구타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나 있었던 일일 텐데 어떻게 지금 이 시대에 저런 야만스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 (…) ‘진보’ 진영의 사람들은 사회의 전면적 과거회귀, 혹은 현재로 귀환하는 과거에 치를 떠는 듯이 보인다. (…) 과연 역사는 전진하고 사회는 발전하고 문명은 진보하는가? 그렇지 않다. 존 그레이가 말하듯 “기술과 과학은 축적되지만 인간의 도덕은 언제나 새로 시작된다.” 물질과 달리 인간과 관련된 부분은 세대를 거듭한다고 해서 더 발전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더 퇴보하기 일쑤다.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보라. 무엇이 바뀌었는가. 인간의 기질과 성향은 세대가 지난다고 자동으로 바뀌지 않으며, 역사도 그렇다. 과거는 갑자기 현재로 귀환하고, 현재는 쉽게 낯설어진다. (…) 최근 개봉한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그 보장 없는 미래, 언제나 귀환하는 본성을 냉정하게 포착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생기는 일들을 바라보노라면, 쉽게 진보를 말하는 일, 마치 우리가 조금만 힘을 모으면 어떤 거대하고 급진적인 변혁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일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오히려 지금은 인간과 진보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성찰하는 일이 필요하다. (…) 야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야만을 ‘척결’한다는 불가능한 바람이 아니라, 그 야만 속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귀환(8월 9일자 한겨레 ‘크리틱’ㆍ문강형준 문화평론가) ☞ 전문 보기

현실과 통하는 극(劇) 요소는 묘사다. 역사 속 인물의 핍진성은 현대인의 전형성에서 추출된다. 이순신 모조물이 그럴싸한 이유다. 서사는 다르다. 신화 원형을 반복 변조할 뿐이다.

“근대 들어 일본에서의 이순신 평가는 부담스러울 정도다. 1900년대 초 일본 역사가 후지이 노부오의 ‘이순신 각서’에는 일본 해군의 영웅 도고 헤이아치로 제독이 이순신을 존경하며 스승처럼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일부 일본 전쟁사학계에서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시킨 도고의 전략 ‘정(丁)자 진법’이 이순신의 학익진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을 제기했다. 일제 때 진해에 주둔한 일본 해군이 매년 이순신 진혼제를 열었다고도 한다. (…) 영화 ‘명량’을 계기로 이순신 열풍이 불고 있다. 리더십 부재의 시대적 상황이 흥행 요인이지만 인간 이순신의 고뇌를 다룬 점도 흡입력을 높였다. 150여 종에 달하는 이순신 서적 중 요즘 많이 찾는 책도 이순신의 내면을 다룬 것들이다. 개인을 전장으로 밀어 넣는 혼란과 고통 속에서 이순신이 겪는 실존적 고뇌가 이순신 리더십의 요체라는 관점이다. 이순신은 박정희 시대의 체제 구축에 이용되면서 신격화됐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순신을 신화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과감히 옮겨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일본인이 본 이순신(한국일보 ‘지평선’ㆍ이충재 논설위원) ☞ 전문 보기

““눈엣가시 ‘아바타’에 뺏긴 5년, 되찾을 때 됐다.”(뉴스엔) (…) ‘명량’의 소재가 외침인 데다 실존인물인 이순신의 전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짐작되었던 바이지만 ‘아바타’에 대한 일차적 비유는 그 애국심의 선정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인터넷에 공공연히 퍼져 있는 “갓순신”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소비 방식은 중국 후한의 명장 ‘관우’가 무속(巫俗)신앙의 장군님이 된 것과 꼭 닮아 있다. ‘명량’의 흥행에는 몇 가지 사회적 맥락이 있다. 공고한 리더십에 대한 갈망이나 리더의 감정 노동에 대한 공감이 흥행에 큰 힘을 보탰을 것이다. (…) ‘광해: 왕이 된 남자’ ‘변호인’ ‘명량’에 이르기까지 최근 1000만 관객 동원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중요한 것은 지금, 관객 그러니까 대중이 허구가 아닌 실제에 환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역사와 실존인물을 소재로 할 때 허구는 완충재 역할을 한다. 메시지는 훨씬 더 분명해지고, 이미지 역시 강렬해진다. (…) 실제에 매혹된다는 것은 대중이 개연성보다는 메시지에 집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가령, 신하된 자의 충이 임금이 아닌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것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지금, 현재, 우리의 이상에 더 가깝다. (…) 결국, 관객들이 역사 속에서 찾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투영될 어떤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 마치, 억압된 것들이 말실수로 귀환하듯이 흥행의 결과는 그 억압된 것들이 어떻게 증상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순신의 고뇌와 감정 노동, 굴욕과 치욕을 통해 우리가 보고 싶은 것,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 지독하게 결핍된 무엇,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치욕스럽고 굴욕스럽게 만들었던 그 무엇일 것이다. 현실이 아닌 기록과 역사에서 대안과 미래를 찾아야 하는 것, 1000만 흥행의 그림자에는 답답한 우리의 현재가 있다.”

-1000만 흥행의 그림자(8월 11일자 경향신문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ㆍ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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