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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차려는 필요악" 보고도 모른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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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 출신 예비역들에 물어보니
15명 중 10명 "큰 효과 없다"… 대부분 "통솔위해 필요"
가혹행위 목격한 10명 중 징계 내린 경험도 3명뿐
병사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휘하는 초급 간부 및 영관 장교들은 얼차려를 필요악이라고 여겼고, 가혹행위를 목격하고도 징계 등 적극 개입에 나선 경험은 10명 중 3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휘관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병영문화 개선 대책을 내놓아도 가혹행위를 근절하는 효과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일보가 최일선에서 병사들의 생활을 관리감독한 경험이 있는 3~22년 경력의 예비역 육ㆍ해ㆍ공군 및 해병대 장교 15명에게 군대 내 가혹행위에 대한 인식을 묻자 3분의 2인 10명이 “굼뜨고 뒤처지는 병사들에게 얼차려를 주는 것은 교육 효과가 없다”고 답했다. 5명은 “군 특성상 위계질서를 세우거나 문제가 있는 병사를 교육하기 위한 목적의 얼차려가 효과가 있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교육효과가 없다는 이들까지도 “얼차려는 필요악”이라며 “부하들을 통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동의했다. 해군 출신 A(31)씨는 “군 조직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병사들에게 얼차려는 부적절하지만, 말썽을 부리거나 군대식 용어로 ‘뺑끼’를 부리며 꾀를 쓰는 병사들을 바로잡기 위해선 얼차려 만한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얼차려의 교육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군 조직의 특성상 얼차려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순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응답자 15명 중 병사들 간 가혹행위나 얼차려를 목격한 경험이 있는 장교는 10명이었다. 이 중 가해자들을 영창에 보내고 징계 처리하고 피해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나선 장교는 3명뿐이었다. 육군 예비역 중위 B(26)씨는 피해 병사들에게 직접 신고를 받아 가혹행위를 알아챈 뒤 상부에 보고해 가해 병사들을 영창에 입감시켰다. 이후 선임 병사들의 가혹행위는 사라졌다.
반면 5명은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주의로 끝냈고, 2명은 “병사들 간 문제는 병사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며 아예 모른 척했다. 공군에서 소대장으로 복무를 마친 C(31)씨는 “대대장에게 보고를 해도 상부에 알려지면 지휘책임을 물어 인사고과가 안 좋게 나올까 두려워하는 대대장이 덮어 버렸고, 감찰이나 헌병, 기무 등에 알리는 건 지휘계통을 무시하는 것이라 그냥 못 본 척 넘어갔다”고 말했다.
소원수리 등 병영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들은 운영 책임이 있는 지휘관들이 정반대의 인식을 갖고 있는 탓에 유명무실해진다. 가혹행위와 집단괴롭힘을 폭력으로 보고 엄격히 징계하기는커녕 군 기강을 잡기 위한 수단 중 하나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육군 28사단에서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사망한 윤모(20) 일병은 4개월이나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소원수리를 통해 집단괴롭힘에서 벗어나려다 상황이 더 악화해 끝내 자살한 박모(사망 당시 20) 일병 사건(본보 11일자 1ㆍ3면)의 경우도 지휘관부터 소원수리를 배신으로 낙인찍으면서 참극으로 비화했다.
군에는 지휘관의 허락을 얻어 유격체조 20~30분, 푸시업 등의 체력 단련 수준의 기합을 줄 수 있는 ‘사랑의 벌’이라는 제도도 있다. 사랑의 벌을 시행하려면 공식적으로 기록을 남겨야 하고, 부대 지휘관들은 문제가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공식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해 결국 이름만 남은 제도가 됐다. 사랑의 벌보다는 음성적인 얼차려에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지휘관들이 이러한 구시대적 인식을 깨뜨리지 않는 한 윤 일병 사건 후 국방인권협의회, 민관군 병영혁신위원회 등을 구성하고 대대급 이상 부대에 인권교관을 임명하는 등의 국방부가 내놓은 대책은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설문에 응한 예비역 장교들 스스로 15명 중 14명이 “(이러한 대책들은) 실효성이 없다”고 응답했다.
계급서열을 중시하며 가혹행위에 둔감한 인식은 군 최고 수뇌부부터 자성할 필요가 있다. 윤 일병에 대한 구체적 가혹행위를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보고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놓고 지금까지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부터 가혹행위에 대한 둔감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세한 가혹행위의 내용을 보고받지 못했기 때문에 적극 대처하지 않은 것에 책임이 없다는 태도가 지금도 전군의 지휘관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주고 있는 셈이다.
육군 출신의 D(29)씨는 “윤 일병 사건을 계기로 위원회들을 만들어서 묵인되고 있던 문제점들을 수면 위로 올리고 왕따나 얼차려 같은 것들에 대한 상담이나 인권 교육을 하는 것도 좋지만 드러난 현상만 해결하는 대책”이라며 “멀리 보고 근본적으로 병영 문화를 개선할 수 있도록 군 수뇌부의 의식의 변화가 선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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