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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일병이 “아니오” 할 수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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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부교수
28사단 윤 일병 구타사망사건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은 온 몸에 피멍이 들어 죽어갈 때까지 당사자도 목격자도 그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폭행의 잔혹성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례적인 일 같지만, 사실 위계가 있는 조직에서는 유ㆍ무형의 권력형 폭력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 정도와 양태가 다를 뿐이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윤 일병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위계적 권력구조의 하층부에 위치한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 일터에서의 노동자나 학교에서의 학생이 대표적이다. 권력이 있는 쪽에서는 약자들의 약점을 본능적으로 찾아내 집요하게 괴롭히고 침묵을 강요한다. 다시 한 번, 문제는 권력이다.
권력이 근본적인 문제라면 완전무결한 해결은 쉽지 않지만, 권력형 폭력을 통제하기 위한 꽤 괜찮은 방법들은 얼마든지 있다. 첫 번째는 조직의 민주화다. 조직 내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당사자들의 참여와 소통으로 결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이 원활한 조직, 그래서 위계가 약하고 상급자와 하급자의 경계가 희미한 조직일수록, 상급자는 감히 부당한 지시를 내릴 수 없고, 설혹 그런 일이 발생해도 하급자들의 저항에 의해 쉽게 진압된다. 단순히 조직문화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경영참가나 학교운영위원회 등과 같은 제도를 통해 조직 내의 공식적 의사결정구조를 민주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두 번째는 약자들이 집단적으로 힘을 합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조합이다. 노동자 개개인은 권력관계에서 열위에 있지만, 집단적으로 노조를 결성해 맞설 수 있다면 권력관계의 우열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다. 한 사람이 “아니오”라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집단적 차원에서 항의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있다면 부당한 권력남용이 자행될 여지가 줄어든다. 학교에서도 학생자치조직인 학생회가 공식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면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외부의 감시와 통제다. 조직의 문제들이 투명하게 외부에 공개돼 있고 그 조직을 감시하는 기제들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면 조직 내 강자와 약자의 불균형이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다. 권력형 폭력이 만연해 있는 조직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것을 용인하는 내부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직 내적으로 정당화하는 잘못된 관행들이 외부의 공정한 시각에 의해 수시로 견제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확대재생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이미 발생한 개별 사건을 처리하는 공정한 절차다. 조직의 의사결정이 민주적이고 외부의 감시체제가 잘 마련된 조직이라고 해도, 위계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 한 권력형 폭력이 완전히 사라지긴 어렵다. 그래서 이른바 ‘고충처리절차’를 마련해 말 못할 고민을 하고 있는 조직 내 약자들의 숨통을 터줘야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마음 편히 문을 두드릴 수 있고 그들의 편에서 문제를 처리해줄 거라고 신뢰할 수 있는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에 있는 명예고용평등감독관이나 대학에 있는 성희롱상담소, 그리고 학생인권조례에 의해 도입된 학생인권옹호관제도 등이 도입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제도의 핵심은 ‘독립성’이다. 기존의 위계 선상에서 처리되기 어려운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도입된 절차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윤 일병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어떤 조직보다 위계적이고, 말단에 있는 병사들의 참여가 배제돼 있고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도 없음은 물론, 폐쇄적이고 외부통제를 받지 않으며, 고충처리절차가 유명무실한 조직이 바로 대한민국의 군대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윤곽이 잡힌다. 군인이 ‘제복을 입은 시민’임을 확인하는 군인권법, 병사 자치ㆍ참여제도, 독립적 고충처리기구 설치 등 제도적인 대안들은 이미 다 마련돼 있다. 더 이상 병사들이 “아니오”라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죽어가게 방치할 수는 없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는 순간에도 병사 두 명이 동반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속보로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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