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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군주' 교황의 어제와 오늘

입력
2014.08.1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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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일보 자료사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느님의 지상 대리자’.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황에게 부여한 권위는 절대적이다. 무소불위 권력을 교황은 갖고 있다. 현재 교황 프란치스코는 ‘로마의 주교’일 뿐이라며 자신을 낮추지만 “모든 길은 로마 교황으로 통하도록”(요한 바오로 2세) 돼있는 게 사실이다.

교황이 진리

교황은 신자가 12억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종교의 수장이다. 교의상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를 통솔한다. 교회 내 모든 법령 제ㆍ개정은 교황의 승인 하에 이뤄진다. 선례를 따르든 무시하든 교황 자유다. 추기경단의 자문과 충고를 받아야 하는 사안도 있지만 최종 결정과 조치는 교황의 판단에 따른다. 교황 말은 거역할 수 없다. 교황이 진리인 셈이다.

교황의 통치권은 입법ㆍ사법ㆍ행정 영역을 망라한다. 주교를 임명하고 추기경을 지명하는 일, 교구를 설정ㆍ관리ㆍ변경ㆍ정지하는 일, 교구장을 보좌할 수 있도록 보좌 주교를 선임하는 일 등도 교황 몫이다. 시복ㆍ시성(施福ㆍ諡聖, 복자ㆍ성인 추대) 역시 교황 권한이다. 교회 재산 관리, 가톨릭 축제일 지정, 청문회 개최 등도 교황이 한다. 재판은 받지 않는다.

불편한 점도 있다. 교황이 되면 자신의 세속 이름과 이전 국적, 시민권을 모두 버려야 한다. 일상 생활에서 사소한 부분까지 규제를 받게 되고 매주 한 차례 고해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교황이 거부하면 그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고국 아르헨티나 국민 여권을 유지키로 한 게 대표적이다. 평범 고수는 특권 포기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2009년 4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바티칸의 성베드로광장에서 부활절을 축하하기 위해 운집한 신도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9년 4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바티칸의 성베드로광장에서 부활절을 축하하기 위해 운집한 신도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절충의 산물

교황권은 종교에 제한되지 않는다. 면적은 0.44㎢에 불과하지만 독립 자치국인 바티칸 시국의 국가 원수가 교황이다. 종교 권력을 지렛대 삼아 세속 지배권까지 확보한 셈이다. 변천사를 보면 현재 교황권은 절충의 산물이다. 초기 교회 300여년을 빼고 교황이 세속 정치와 무관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 세속 권력의 동반자였지만 반목하면서 부침을 겪기도 했다.

성(聖)과 속(俗) 간 교류는 로마 제국 말기부터다.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거처(라테란궁)를 기증하는 등 교황에게 특권을 줬다. 중세는 교황권의 절정기였다. 세속군주 위에 교황이 군림했다. 황제를 무릎 꿇렸을 정도다(1077년 카노사의 굴욕). 군주 노릇까지 했다. 이탈리아반도 중부 교황령을 직접 통치했다.

13세기 말부터 교황 위세는 내리막을 탔다. 14세기 들어 교황이 프랑스의 볼모 신세가 되는 일도 있었다(1309~77년 아비뇽 유수). 1789년 나폴레옹 침공 땐, 프랑스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다. 급기야 1,100년 동안 유지해 오던 교황령마저 상실하는 처지에 놓인다. 1870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군대에 의해 로마가 함락 당하면서다.

지난 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을 찾은 시민들과 만남을 갖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을 찾은 시민들과 만남을 갖고 있다. AP=연합뉴스

변화의 조짐

교황권이 현재 모양으로 확립된 건 1929년 당시 교황(비오 11세)이 파시스트 정권과 라테란 협정을 맺으면서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바티칸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대신 교황의 승인으로 지배 체제를 굳히길 바랐다. 교황은 세속 지배권과 더불어 교회 자율성을 되찾았다.

이후 ‘교황 독재’ 체제였던 가톨릭 교회는 서서히 세속 사회와 닮아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가 교회 민주화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교황들은 ‘절대 군주’를 상징하는 칭호와 관행들을 잇달아 폐기했다.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건 교황이 1978년 취임한 요한 바오로 2세. 지난 30년은 절대 군주제 회귀가 시도된 반동의 시기였다.

분산돼 가던 교회 권력은 요한 바오로 2세 재임 시절 로마로 다시 집중됐다. “폴란드 출신 교황이 마음 속에 그린 교회는 백성의 평등한 공동체가 아니라 평신도가 사제와 주교의 지도로 진리를 찾아가는 위계 사회였다”는 게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설명이다.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교황은 다원주의를 징계하고 지역교회의 권한을 회수했다.

그러나 재구축됐던 교황권의 철옹성에 균열 조짐이 보이고 있다. 지난해 3월 취임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체 방침을 천명하면서다. 그는 지난해 11월 첫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발표하면서 “이제 교황의 권한을 나눠 갖는 ‘건전한 분권화’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낙하산 인사’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기존 지배구조를 손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주필은 “교황청이 가톨릭 교회의 통일성을 명분 삼아 신앙인들의 자유로운 연대인 신앙 공동체의 다양한 견해와 활동을 박해하고 있다”며 “교회 내에 남아 있는 ‘제국 교회’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 회벽에 갇힌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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