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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 잔혹사, 고질병 넘어 불치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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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효율 미명하에 폭력 정당화… 바깥사회와 단절 끝없는 악순환
땜질·겉핥기 대책 반짝 효과만… 국방옴부즈맨 등 인권보장 조치를
2008년 경기 연천의 한 부대를 전역한 김모(30)씨는 지하철 구호용품보관함에 들어있는 방독면을 볼 때마다 분노가 치민다. 이등병 때 당한 가혹행위가 생각나서다. 당시 그는 부대 적응을 못해 관심병사 취급을 받았다. 김씨는 4일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던 나를 선임병들은 ‘고문관’으로 여겼고, 하루는 코골이가 심하다며 반성하라는 뜻으로 방독면을 쓰고 자게 했다”며 “그 이후 자신감이 더 떨어져 군 생활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4월 육군 28사단에서 선임병들의 지속적 가혹행위로 숨진 윤모(23) 일병과 같은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구타와 집단괴롭힘 등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동료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사고가 반복돼 왔다. 그럴 때마다 군은 병영문화 개선 대책을 외쳤다. 1999년 신병영문화 창달방안에 이어 2003년 병영생활 행동강령과 사고예방 종합 대책, 2005년 선진 병영문화 비전, 2012년 병영문화선진화 방안 등이다.
하지만 이런 대책이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군대 내 가혹행위는 여전히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고 대형 사고로 불거지고 있다. 군의 대책들이 근본적으로 ‘작전수행의 효율성과 군기 강화를 위해서는 언어ㆍ신체적인 폭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변화를 전혀 불러오지 못한 것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식 목표지상주의는 정해진 기준에 미달하는 사병에 대한 폭력을 부대 전투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의(善意)’로 간주하고 있다. 시민사회와 단절된 폐쇄적 군 공동체는 민주주의 기준을 무시하고 군대만의 원칙을 공고히 유지하고 담합한다. 한 군 간부는 “민주주의 안에 군대는 있어도 군대 안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말했다.
군인권센터가 지난해 현역 장병 305명을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구타ㆍ가혹행위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지시불이행이 가장 많았고 뒤이어 부대 부적응ㆍ내무생활 불량ㆍ관행ㆍ군기 부족이었다.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적응하지 못하면 때려도 된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홍두승 교수는 “원칙적으로 분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 간에는 지휘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상명하복의 문화 탓에 선임병이 후임병 위에 군림하는 문화가 잔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병사들의 권익을 구제하겠다며 소원수리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별 소용이 없다. 사실상 사회로부터 단절된 채 내무생활을 하는 부대원들은 의견이나 불만을 개진해도 통제된 부대의 담합 아래 불이익만 받기 십상이다. 지난해 전역한 임모(24)씨는 “분대장이 내린 ‘담배 통제령’을 적을까 했는데 소원수리를 내도 바뀌는 게 없고, 익명이지만 들킬까 봐 걱정이 돼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군내 폭력은 있어도 없는 일이 된다. 소통의 단절은 가혹행위를 견디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하고, 쌓이고 쌓인 분노는 폭발해 총기난사와 같은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군 당국이 가혹행위를 뿌리뽑겠다는 의지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군 관계자는 “병영문화선진화 방안은 군 적응을 위해 이등병 복무기간을 2개월 줄였는데, 그런다고 가혹행위가 없어지겠냐”고 지적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독일식 감독관 제도인 국방옴부즈만제도를 도입해 수면 아래에 있는 군대 폭력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는 한편 군 당국부터 사병을 ‘병력자원’이 아니라 ‘제복 입은 시민’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갖고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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