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단 공무원부터 고위급까지 '비리 사슬' ... 수법은 교묘해지는데 처벌 약해 사고 악순환

입력
2014.06.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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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검사를 신청할 예정인데 미흡하더라도 잘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1990년 7월 중순 삼풍건설산업 이준 회장이 황철민 서울 서초구청장을 다급하게 방문했다. 1989년 말부터 임시사용승인을 받아 삼풍백화점 영업을 시작했지만 한달 전 신청한 건물 준공검사 결과 내장공사, 교통영향평가 등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황 구청장에게 불쑥 1,000만원을 내밀었다. 이후 준공 검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황 구청장은 즉시 직원들에게 결재서류를 올리라고 지시했고 서울시와 협의를 거쳐야 하는 부분은 허위로 서류를 작성하도록 해 준공을 허가해줬다.

대형참사의 그늘에는 어김없이 공무원의 비리가 자리잡고 있다. 건설업체가 아무리 부정을 저지르려 해도 인ㆍ허가권이 있는 공무원들이 같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부실 시공은 불가능하다. 502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삼풍백화점 참사는 부실 정도가 큰 만큼 비리에 얽힌 공무원들도 말단부터 고위직까지 총체적으로 얽혀 있었다.

황씨에 앞서 서초구청장을 지낸 이충우 전 구청장도 1989년 11월부터 1990년 4월까지 6차례에 걸쳐 설계변경 및 건물 가사용을 사후 승인해주며 1,000만원의 뒷돈을 받았다. 이 때 삼풍 측은 애초 작성한 설계도면을 무시하고 멋대로 증축ㆍ용도변경을 반복하며 매장을 크게 넓힐 수 있었다.

말단 공무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초구청 주택과 직원 정지환씨는 삼풍건설이 설계도와 달리 매장 크기를 당초 계획보다 2배 넓게 무단 증축한 내용을 담아 제출한 설계변경 신청서를 200여만원을 받고 승인해줬다. 서울시 상정(商政)계장 정상기씨는 백화점 개장을 하루 앞둔 1989년 11월30일 “내일 백화점을 개장해야 하니 빨리 서류를 작성하라”며 담당 공무원에게 백화점의 각종 시설이 허가조건에 맞게 설치됐는지를 점검하는 ‘현장확인복명서’를 즉석에서 작성하도록 했다.

관련 비리로 기소된 공무원은 10여명에 달하지만 황철민, 이충우 전 서초구청장은 각각 징역 10월을, 정지환씨와 정상기씨는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는 등 대부분 집행유예에 그쳤다. 책임 소재가 여러 명에게 분산되면서 형량도 줄어든 것이다.

공무원들의 이런 부적절한 업무행태는 19년 뒤 세월호 침몰 참사에서도 반복됐다. 오히려 더 교묘해졌다.

선박의 안전 검사와 운항관리 책임을 맡은 한국선급과 한국해운조합에 ‘해피아’로 불리는 해양수산부 출신 퇴직 관료들이 진출해 전ㆍ현직 공무원 사이에 결탁이 이뤄지면서 안전관리감독은 소홀해 졌다. 해양사건을 심판하는 행정기관인 해양안전심판원 역시 지난 5년간 해양사고가 4,800건에 육박했는데도 면허 취소 처분을 한 차례도 내리지 않았을 정도로 느슨하게 일처리를 했다.

명백하게 직무유기를 한 공직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법률 전문가들은 공무원들이 뇌물수수 등 비리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때와는 달리 세월호와 관련해 법적 책임을 묻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태원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은 “공무원에게 법적 책임을 물으려면 사건 발생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세월호 참사의 경우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낮은 게 사실”이라며 “관리감독도 안 하고 업무도 대충 하는 나태한 공무원들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이 없다는 게 한계”라고 지적했다. 정승임기자 cho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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