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철의 여인' 대처의 유산

입력
2013.04.09 11:51

'브래스트 오프' '빌리 엘리어트'와 같은 영화 혹은 뮤지컬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주제가 희망 찾기라는 것, 또 하나는 몰락한 영국의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슷한 내용의 '풀 몬티'까지 함께 보면 영국 사회의 어려웠던 상황을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영국 탄광 마을이 본격적인 충격에 휩싸인 것은 마거릿 대처 총리가 적자에 허덕이는 국영 탄광을 폐업하고 탄광 노동자를 해고하기로 하면서다. 취임 직후부터 민영화와 시장주의를 밀어붙이고 공공부문을 위축시키던 대처는 1984년 탄광노조가 파업에 들어가자 강경 대응으로 맞서 승리를 거둔다. 대처는 이를 계기로 과다한 사회복지, 강성 노조, 임금 상승, 생산성 저하 등 이른바 영국병을 치유하겠다고 더욱 매진하는데 이때 동원한 대처리즘 정책은 영국 사회를 뿌리째 흔들었고 그 때문인지 1980년 마이너스를 기록했던 성장률은 1988년 5.6%까지 올라갔다.

대처리즘은 영국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념적 동반자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세금 감면, 복지 축소, 구조 개혁 등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대처리즘과 보조를 맞췄다. 세계 최강 미국까지 채택한 정책에 많은 나라가 호응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는 듯 했다.

21세기가 시작하고도 10년 이상 흐른 지금 대처 등이 실천한 신자유주의는 아직도 추종자가 많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양극화와 시장만능, 무한경쟁의 주범으로 신자유주의를 지목한다. 극단적 경쟁 끝에 승자가 이익을 독점하고 패자는 설 자리를 잃는데도 정부는 수수방관 승자 편을 드는 게 신자유주의의 얼굴이라고 이들은 비판한다.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인사들이 모이는 다보스포럼조차 지금의 경제 체제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대처리즘이 한 순간 영국병을 치유한 듯 보였지만 근본적 치유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8년 정점에 오른 영국의 성장률이 불과 2년 뒤 0.8%로 추락한 것은 대처리즘의 짧은 효용성을 보여준다. 과거보다는 나아졌다 해도 지금의 영국 경제를 세계 모범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 것은 대처의 정책이 영국 문제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처리즘의 또 다른 얼굴은 대결이다. 대처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세력을 이해하거나 포용하지 않았다. 노조를 억압했고 빈민들을 이해하지 않았다. 버젓한 현존 세력인 공산권과도 큰 갈등을 빚었다. 아르헨티나가 1982년 포클랜드를 점령했을 때 그는 외교 수단이 아니라 전쟁을 선택했다.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해 상황이 일단락됐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 포클랜드는 여전히 갈등에 휩싸여 있다.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반동성애법을 만들었지만 지금 영국은 동성애에 관대한 나라다.

그는 1990년 자신의 정치 인생을 돌아보며 "나는 계속 싸웠고 싸워서 이겼다"고 말했지만 그 승리는 잠깐의 승리였을 뿐 궁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대처가 20세기 후반을 움직인 가장 두드러진 정치 지도자인 것은 맞지만 그의 정책이 영국과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했고 지금도 다수의 공감을 받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대처를 박근혜 대통령은 롤 모델로 삼고 있다. 새누리당 후보로는 이례적으로 복지를 내세워 당선된 박 대통령이, 복지를 대폭 삭감한 대처를 존경하고 닮고자 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지만 여성으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다짐의 발로로 이해할 수는 있다. 박 대통령이 리더십을 부러워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남북한 및 한국 내부의 갈등을 해소할 교훈을, 대처의 죽음에 대한 평가 속에서 배웠으면 좋겠다.

박광희 국제부장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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