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용어 왜 문제인가/ 헌법 골간은 자유-사회민주주의…양 날개가 '민주주의'로 포괄

입력
2011.09.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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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달 새 역사 교과서 교육과정 고시 직전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졸속 변경한 것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이 같은 용어 변경을 사실상 주도한 뉴라이트측 학자들은 "우리 헌법 이념이 자유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의미를 분명히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본래 의미와 달리,'시장자유주의'나 '반공주의' 등 좁은 의미로 통용돼 왔다는 것이 대다수 역사학자들의 반박이다. 특히 우리 헌법이 경제영역에선 부의 재분배를 위한 국가개입을 인정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함께 담고 있어 자유민주주의만 강조할 경우 헌법 정신을 왜곡시킨다는 지적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공존

헌법이 전체주의와 대립되는 정치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데는 헌법학계에서 큰 이견이 없다. 사상ㆍ표현의 자유 등 자유주의와 삼권 분립, 법치주의, 다당제와 선거제도 등 민주주의 제도가 결합된 정치체제로서 구 공산권이나 북한의 일당독재식 인민민주주의 내지 파시즘 체제와 대립된다는 것이다. 뉴라이트 학자들이 "민주주의만 사용할 경우,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사회민주주의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중략)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중략)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경제 민주화 조항을 비롯해 재산권 규정(23조), 노동권 규정(32조) 등이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로 꼽힌다.

헌법학자인 정종섭 서울대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이지, 사회민주주의와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 역시 "우리 헌법은 정치 영역의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영역의 사회민주주의가 상호 보완하는 체제로, 이를 포괄하는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한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추구했던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라, 헌법이 인권으로서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을 보완하기 위해 재산권 제한, 시장 경제의 규제, 부의 재분배 등의 국가 개입을 인정한 것이다.

시장자유주의, 반공주의로 왜곡

하지만 보수진영 일각은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 등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맞지 않는다며 삭제를 주장한다. 한국경제연구원, 헌법포럼, 경기개발연구원이 2007년 공동 주최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확립을 위한 헌법개정 방향' 토론회에서 보수 학자들이 제시한 헌법 개정 시안에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모두 삭제됐다. '자유민주주의가 평등주의에 함몰되지 않아야 한다' '반시장적 요소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는 시장자유주의에 가까운 뜻인데, 이는 최근 대기업 규제 논란 때도 전경련이나 보수 단체들의 반박 논리로 어김없이 등장했다. 1987년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은 김종인 전 청와대 수석은 "이 조항을 삭제하자는 주장은 경제 현실도, 이론도 모르는 뚱단지 같은 소리"라며 "민주주의의 참뜻도 모른다"고 일축했다.

보수 인사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사실상 시장자유주의와 같이 보는 데는 냉전 시대 반공 논리가 깔려 있다. 북한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부의 재분배를 위한 국가 개입 등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사실상 사회주의 아니냐는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 헌법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2년 제정된 유신헌법에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유신독재체제의 등장과 함께 자유민주주의가 국시로까지 상승했는데, 독재세력에 의해 냉전자유주의, 또는 반공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용어로 기능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유민주주의는 헌법 자체를 포괄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왜곡 사용돼 왔기 때문에 민주주의란 용어를 일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념 투쟁의 장으로 변질 우려

특히 교과서의 헌법에 해당하는 교육과정에 사실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란 용어를 채택한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불신도 크다. 근현대사 역사 서술에서 민주주의를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대체하면 군부 정권의 권위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가능성도 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요즘 시대에 민주주의란 용어를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로 해석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자유민주주의가 강력한 정치이념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용어가 오히려 교육현장을 이념 투쟁의 장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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