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노정객의 죽음

입력
2010.07.02 12:32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초짜 연방 상원의원으로 2005년 워싱턴에 진출해 의정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주변에 묻고 다닐 때였다. 그가 만난 동료의원들은 한결같이 "만사 제쳐두고 되도록 빨리 로버트 버드 의원을 만나라"고 권유했다. 당시 87세의 최다선 상원의원이자 200여 년에 걸친 상원의 정신과 역사를 그대로 체현한 인물로 평가 받던 사람이어서다. 실제로 상원에 대한 그의 박식함과 열정을 능가할 만한 것은 오직 두 가지 뿐이었다. 68년 동안 함께 살아온 병상의 아내에 대한 애정과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헌법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 오바마의 자서전 에 길게 나오는 얘기다. 취임선서를 하던 날 민주당 의원총회 자리에서 버드를 만난 오바마는 미국 헌법과 독립선언문의 약속을 체화한 상원의 역할을 설파한 그의 연설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날 밤 그는 사무실로 돌아와 법전을 꺼내 다시 읽으며 건국의 밑바탕이 된 정신-권력 분산과 절대성의 부인, 개인기본권과 소수의 존중-을 새삼 확인하고 상원의원의 임무를 깨닫게 됐다고 술회했다.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가 완벽보다 타협과 중용, '그럭저럭 꾸려나가는' 행태를 옹호하는 것 같다는 통찰도 얻었다.

■ 며칠 후 사무실로 찾아온 오바마에게 버드는 자신의 의정활동을 기록한 책을 선물하면서 갑자기 "한 가지 후회하는 일이 있어, 바로 젊음의 어리석음 말이야…"라고 말했다. 20대 시절 고향에서 백인우월주의 극우단체인 `KKK' 단원으로 활동했고 60년대엔 민권법 제정에 반대해 무려 14시간 동안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를 했던 잘못에 대한 자괴감의 표현이었다. 흑인인 오바마를 보면서 수십년간 사과해온 자신의 과오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버드는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했고 의료보험 개혁법안 등도 적극 뒷받침했다.

■ 1953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출발해 58년부터 임기 6년의 상원의원 9선의 전설적 기록을 세운 그가 지난달 28일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지난해 8월 77세로 타계한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에 이어 미국 사회가 또 하나의 큰 별을 잃은 셈이다. 특히 오바마로선 금융개혁법안 처리를 위한 상원전력 손실과 함께 정신적 지주를 잃은 것이 크게 마음 아팠을 것이다. 이름도 생소한 남의 나라 노정객 이야기라고 해도, 존경 받는 어른을 찾기 힘든 우리 정치현실에서 보면 감동스런 대목이 있다. 세대교체를 외치는 젊은 정치인들이 그 맥을 잘 짚기 바란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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