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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로 일궈낸 의성사과 수출… 꿀맛입니다"

입력
2010.01.04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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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면식도 없던 사내 셋(농민 유통상인 대기업사원)은 각자 생각에 골몰했다.

'수출은 무슨 얼어 죽을. 땅은 정직한데 장사꾼은 입만 떼면 순 거짓부렁이야. 좋은 것만 쏙 빼가고 나머지는 팽개치면 어쩌란 거야. 다 소중한 놈들인데. 믿을 놈 하나 없어.'(권오찬 경북 의성군 사과수출단지 회장)

'품질도 좋고, 관련시설도 최고로 갖췄는데 왜들 믿지 못할까. 맡겨만 주면 승산이 있다는데도 꿈쩍 안 하네. 한번만 믿어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을 것을.'(이상준 의성APC 센터장)

'농산물은 수입만 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걸 달라고 하는 해외바이어도 있네. 시험 삼아 보내볼까, 방법은?'(고재천 CJ프레시웨이 해외사업팀장)

스치는 단상이었다면 몽상에 그쳤을 터. 인연이란 게 그렇듯 셋은 우연찮게 연달아 만나 속내를 털어놓았다. 말이 된 세 갈래의 생각은 쑥쑥 길이가 자라더니 날줄씨줄로 얽혀 한 가닥 꿈을 짰다. 1년 만에 셋은 사과수출 역군이라는 둘도 없는 동지가 됐다.

인연의 시작

가을걷이가 끝난 과수원엔 추위가 영글었다. '사과수출단지'라는 거창한 명패가 달린 경북 의성군 옥산면 신계리 일대(66만1,160㎡ㆍ20만평)의 사과농장 15곳이다.

연간 1,000톤이 생산되는데 올해는 전량 대만으로 수출한다. 사과 전체생산량(45만톤)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국내사과 수출물량(7,000톤)을 따지면 무시 못할 분량이다.

전국 사과의 7%를 담당하는 의성사과. 맛도 밀리지 않으나 얼음골사과(밀양)니 꿀사과(청송)니 일찌감치 브랜드화에 성공한 타지 사과에 밀려 대접이 시원찮았다. 그 때묻지 아니한 소외와 외면이 수출 동력이 된 건 아이러니다.

지난해 3월 고(36) 팀장은 대만으로부터 사과주문을 받았다. 이름난 사과들은 손이 많이 타 값이 비싸고 원하는 품질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2008년 말 문을 연 의성APC의 이(47) 센터장에게 'SOS'를 쳤다.

수출기회가 생기면 함께 일하자는 뜻을 몇 달 전 나눈 터였다. APC(Agricultural Products Processing Complex)는 거점산지유통센터를 이르는데, 지역 농산물의 선별, 농가관리를 도맡는다. 이 센터장이 흔쾌히 나서 저장된 15만톤을 대만에 보냈다.

반응이 좋았다. 더 달란다. 고 팀장과 이 센터장은 어깨를 들썩이는데, 농민들은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그만치 수출한 건 더러 있어. 뜨내기 보따리장수가 저 필요한 만큼 골라가고 입 싹 씻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라야지." 권(45) 회장이 찬물을 끼얹었다. 불신의 앙금부터 긁어내야 했다.

3각 편대의 대만 진출기

사과가 나지 않는 대만은 전세계(미국 일본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뉴질랜드 등) 사과가 다 모이는 곳이라 경쟁이 치열하다. 부동의 1위는 25%를 점령한 일본사과. 우리는 2%대(2008년 기준)다. 입맛과 조건이 까다로운 고급시장 대만을 뚫기 위해선 농민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대만 현지검역관이 찾아와 수출단지 조성을 위한 기준을 제시했다. 0.6㎜의 구멍도 허용하지 않는 선별 및 관리시설은 기본, 다행히 의성APC는 최첨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아니 먼지구멍도 다 막았다. 문제는 다음 항목들이었다.

1. 사과농장 200m 이내 심식나방이 사는 복숭아나무 제거(대만에 없는 심식나방이 나오면 수출금지다)

2. 사과겉면의 빨간색(색태)은 7~8할 유지(그리하려면 사과에 일일이 봉지를 씌워야 한다)

속고만 살아온 농민들은 고개를 저었다. 일과 비용이 느는 것도 짜증났지만 수출길이 막히면 봉지 씌운 사과(유대사과)는 자연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놈들(무대사과)보다 맛이 덜해 국내에선 잘 팔리지도 않기 때문.

의성APC와 CJ프레시웨이는 "수출과 상관없이 전량 사주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했다. 유례가 없는 일이다. 대만에도 농민들을 데려갔다.

미리 딴 사과(중생종)가 현지에서 일본사과와 같은 값(㎏당 2,900원)을 받고, 400톤이 연이어 배에 실려나간 뒤에야 농민들은 웃었다. '아리랑(阿里郞)사과'란 브랜드로 팔려나간 의성사과는 대만에서 한국을 대표하게 됐다. 우리나라사과의 대만시장 점유율은 그사이 5%가까이 치솟는다.

박기동(41) 의성APC 대표는 "농가는 생산, APC는 관리 및 선별, CJ는 시장정보제공 및 판로개척 등 3개의 톱니바퀴가 '신뢰'라는 윤활유를 머금고 돌아가 이룬 쾌거"라고 평했다.

권 회장은 "평생 농사만 짓다가 외화벌이를 하게 돼 기쁘다"고 했다. 의성사과 수출은 표준모델로 꼽혀 대만 등을 비롯한 관련업계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20억원의 가치

CJ프레시웨이는 본디 식자재유통 및 단체급식 전문. 올해 처음 농산물 수출에 발을 들였다. 농협이나 지방자치단체 등이 관련된 농산물 수출업체는 있지만 민간기업이 나선 건 드물다. 고 팀장의 제안 덕이다.

그는 "해외바이어가 버섯을 수출하라는 제의에 응한 게 시작"이라며 "우리 농산물은 품질 및 가격의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했다. 이후 CJ의 농산물 수출은 사과 멜론 양배추 양파 아스파라거스 등으로 이어졌다. 농산물 수입만 하던 CJ의 해외사업 팀은 수출도 도맡게 됐다.

지난해 매출(11월 기준)은 20억원 남짓. 회사 전체매출(7,500억원)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수입농산물에 밀리던 우리 농산물을 해외로 팔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게 가늠할 수 없는 소득. 올해는 마늘 배 딸기 파프리카 수산물로도 수출항목을 넓혀갈 계획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엔 신뢰가 여물었다.

의성=글ㆍ사진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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