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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9> 언어는 생각의 감옥인가?-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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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일곱 빛깔 무지개’라는 말을 한다. 서로 다른 빛깔의 띠 일곱 개가 무지개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영어(Seven colors of the rainbow)나 프랑스어(Sept couleurs de l'arc-en-ciel)를 비롯해 다른 자연언어들에도 이와 똑같은 표현이 있다.
(사실 ‘일곱 빛깔 무지개’라는 한국어 표현은 그 같은 유럽어 표현들을 일본어에 기대어 차용한 것일 테다.) 그러나 무지개는 빛깔의 연속체이므로, 육안으로 또렷이 구분되는 띠가 거기 있을 리 없다. 빛깔들의 경계를 획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무지개에서, 그저, 제 모국어가 지닌 기본 색채 어휘 수만큼의 띠를 들춰낼 뿐이다.
그러니, 무지개가 ‘빨주노초파남보’라는 일곱 빛깔을 ‘공식적으로’ 띠게 된 것은 유럽어(와 유럽어 표현을 번역차용한 한국어)를 포함한 많은 자연언어가 무지개의 색상에 얼추 대응하는 색채 어휘를 우연히도 일곱 개씩 지녔기 때문이랄 수 있다. (17세기 말 유럽인들이 무지개 빛깔을 일곱으로 확정한 데는 기독교 신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이 문제는 접어두자.)
독일 출신의 미국인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1884~1939)와 그의 제자 벤저민 리 워프(1897~1941)는 여기서 어떤 영감을 얻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무지개의 띠가 몇 개냐고 물었다. 대답은 제각기 달랐다. 사피어와 워프는 이 설문 결과에 기대어,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에 얽매인 채 세계를 경험한다고 판단했다.
언어가 인식·사고를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은 부분적으로만 옳은 주장
인간이라면 누구나 언어 이전의 ‘멘털리즈’가 있어 한국어·일어·영어 모두에 사고의 가능성 무한
이 판단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모국어가 그어놓은 선에 따라 자연세계를 분단한다”는 워프의 유명한 발언이 나왔다. 언어가 의식을, 사고와 세계관을 결정한다는 이 견해는 사피어-워프 가설 또는 언어결정론이라 불리며 그 뒤 언어학과 인지과학의 논란거리가 돼 왔다.
워프는 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누이트(에스키모)의 어떤 언어공동체에는 ‘눈’(영어의 snow)에 해당하는 말이 400개나 된 사실을 내세웠다. 이 400개 운운은 워프의 조작(이 아니라면 심한 과장)이었음이 뒷날 드러났다. 이누이트의 언어에 눈을 가리키는 말이 영어보다 많다는 사실을 처음 밝힌 서양인은 독일 출신의 미국인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1858~1942)인데, 그가 제시한 단어는 네 개에 불과했다.
보아스는 이누이트의 일부 언어가 ‘내리고 있는 눈’과 ‘땅에 쌓인 눈’과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눈’과 ‘바람에 흩날려 한 곳에 쌓인 눈’을 각각 다른 단어로 부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400개든 네 개든, 워프에게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눈을 가리키는 단어를 네 개나 지닌 이누이트는 거기 해당하는 단어를 하나밖에 지니지 못한 영어화자보다 눈을 네 배나 넓고 섬세하게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사실, ‘눈’에 해당하는 이누이트어 단어들을 제시하며 보아스가 내놓은 주장은 문화나 삶의 방식이 언어에 반영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언어는 현실의 거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판단이다. 사피어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언어가 현실의 거울일 뿐만 아니라 현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언어와 현실이 서로를 규정한다고 보았다. 이것도 경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견해다.
흔히 ‘정치적 올바름’이라 부르는 완곡어 운동(예컨대 ‘검둥이’나 ‘흑인’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대치하는)은 언어가 현실을 부분적으로는 규정할 수(개선하거나 악화할 수)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워프는 스승보다도 더 나아갔다. 그는 언어와 세계의 상호작용에서 언어 쪽의 힘을 더 크게 평가하며, 세계가 언어를 결정한다기보다 언어가 세계(인식)를 결정한다고 과감히 주장했다. 이때, 인간의 인식이나 사고나 문화 따위는 언어 안에 갇혀 있게 된다. 이것도 받아들일 만한 견해일까?
이런 언어결정론은 20세기 전반기의 ‘흘러간 이론’이 아니다. 2004년, 피터 고든이라는 미국인 심리학자는 브라질에서 피라하족(族)이라는 수렵채취 종족을 관찰했다. 고든은 그 과정에서 피라하족의 언어에는 수사가 ‘하나’, ‘둘’, ‘많다’의 셋밖에 없을 뿐 아니라 이 종족의 많은 사람들이 셋 이상의 수를 셈하는 걸 매우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 관찰에 기대어, 피라하족의 언어가 피라하족의 세계인식을 규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워프가 언어결정론을 주장했을 때, 그 언어는 특정한 어휘라기보다는 문법 범주들을 가리켰다. 그의 이런 착상은 그 뒤 수많은 작가들(주로 과학소설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그들로 하여금 갖가지 ‘별난’ 언어들을 가공의 공간 속에 배치하게 만들었다. 혁명이나 반항을 연상시킬 수 있는 어휘 자체를 없애버린 <1984년>(조지 오웰)의 ‘뉴스피크’(신어)를 위시해, 1인칭 단수 대명사(‘나’)가 없는 언어, 구체명사가 없는 언어, 소유대명사나 소유형용사가 없는 언어 따위가 이런저런 소설 속에서 설정됐다. 그리고 그 가공의 공간 속에서, 그 언어들은 그 언어 화자들을 순응주의자로, 집단주의자로, 관념주의자로,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이 소설들의 등장인물들에게 언어는, 워프가 생각했듯, 사고와 행동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언어학자나 인지과학자의 주류는 이런 언어결정론을 부정한다. 사람의 생각은 그가 쓰는 자연언어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라고까지 판단하는 이론가도 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가 그 예다. 핑커에 따르면, 사람은 영어나 중국어나 아파치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언어’(language of thought)로 생각한다. 그 ‘사고의 언어’는 모든 자연언어들에 선행하는 메타언어다. 핑커는 자연언어들로부터 독립적인 이 추상언어를 ‘멘털리즈'(mentalese)라 불렀다.
핑커의 이런 견해는 모든 자연언어가 심층구조에서는 동일한 문법을 지녔다는 촘스키 이후 언어학자들의 생각과 통한다. 이런 보편문법이나 ’멘털리즈‘를 상정하는 한, 지각의 근본적 범주와 인식작용은 인류에게 종(種)보편적이고, 따라서 자연언어들의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표면구조로부터 독립적일 수밖에 없다.
촘스키나 핑커 같은 전문가들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언어결정론은 경험적으로도 미심쩍다. 사람의 사고와 인식이 모국어와 어느 정도 상호작용을 하는 듯 보이긴 하지만, 더 큰 결정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고와 인식 쪽이지 언어 쪽은 아니다. 이를테면 한국어는 그 고유어에 빛깔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어휘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다. ‘빨갛다’ 계통의 형용사만 해도 한국어 사전에 올라있는 것이 예순 개 가까이 된다.
(일부만 예를 들자면 빨그스레하다, 빨그스름하다, 뻘겋다, 뻘그스레하다, 뻘그스름하다, 뻘그죽죽하다, 발갛다, 발그레하다, 발그무레하다, 발그스레하다, 발그스름하다, 벌겋다, 벌그레하다, 벌그스레하다, 벌그스름하다, 벌그죽죽하다, 새빨갛다, 시뻘겋다, 붉다, 불그데데하다, 불그레하다, 불그름하다, 불그무레하다, 불그스레하다, 불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 불긋하다, 불긋불긋하다, 검붉다 등.) 그런데 자음이나 모음을 교체하고 이런저런 접사를 붙여가며 한국어가 제 어휘장 안에 마련한 이 섬세한 색채어휘 덕분에 한국인들의 색채 감각은 다른 자연언어 사용자보다 훨씬 더 섬세해졌는가?
조형예술사 책에서 한국인들의 이름을 찾기 어려운 걸 보면 그건 아닌 듯하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육안으로 변별할 수 있는 무지개 빛깔의 수는 제 모국어가 구별하는 무지개 빛깔의 수보다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영어나 한국어에 눈을 가리키는 말이 네 개가 아니라 하나뿐이라 해서 영어화자나 한국어화자가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땅에) 쌓인 눈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누이트 이외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그 눈들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들이 쓰는 언어 때문이 아니다. 셋 이상의 수를 헤아리는 데 서툴다는 브라질의 피라하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수 계산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언어에 수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수렵 채취 활동에 수 계산이 그리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의 to be에 해당하는 동사가 스페인어에는 둘이 있다. ser와 estar가 그것이다. ser는 불변적 본질적 속성과 관련이 있고, estar는 가변적 상태나 존재를 나타낸다. 예컨대 영어의 good에 해당하는 형용사 bueno를 ser 동사와 함께 쓰면 ‘선량하다’는 뜻이 되고 estar 동사와 함께 쓰면 ‘건강하다’는 뜻이 된다.
또 영어의 pretty에 해당하는 여성형 형용사 guapa를 ser 뒤에 붙이면 원래부터 예쁘다는 뜻이지만 estar 뒤에 붙이면 일시적으로 예뻐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스페인어화자가 영어화자보다 존재와 상태에 대한 인식이 더 섬세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스페인어는 영어로 충분히 번역될 수 있고, 영어도 스페인어로 충분히 번역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관사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화자들이라 해서 “He loves a girl”과 “He loves the girl”의 차이를 분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고나 인식보다, 더 나아가 세계보다 언어가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언뜻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언어라는 것에 어떤 위광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사피어-워프 가설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에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지적 논쟁의 흥미로운 주제였다. 언어결정론은, 유구한 반-이성주의 전통 속에서, 고대 인도의 언어학자들로부터 근대 독일의 낭만주의 문필가들에 이르는 강력한 지지자들을 얻었다.
이런 전통과는 이질적인 기반 위에 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내 언어의 한계들은 내 세계의 한계들을 뜻한다”는 멋진 정식으로 다른 방향에서 언어결정론을 거들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결정론은 자연언어들의 세계 분절 방식 차이에 바탕을 둔 워프의 언어결정론과 층위를 달리 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속화하며 기계적으로 밀고 나가다 보면, 기이한 언어신비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일본어에는 특별한 주술적 힘이 있어서 그것이 일본에 복을 가져다 준다고 여기는 이른바 고토다마(言靈) 신앙은 이런 언어신비주의의 극단적 예다. 또 자연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이댄다면, 실어증 환자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를 것이다.
분명히, 언어는 사고나 세계관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언어가 사고나 세계관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언어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인식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언어의 도움 없이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적어도 일반적 수준에서는, 언어가 사고의 흔적이고 세계관의 흔적인 것이지, 그 거꾸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사고나 세계관이 언어의 흔적인 것은 아니다. 영어화자에게도, 한국어화자에게도, 스와힐리어화자에게도, 사고와 인식의 가능성은 똑같이, 무한히 열려있다. 그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한, 그에겐 보편문법으로 운용되는 ‘멘털리즈’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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