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 비화 대통령의 사람들]<4>권력의 균열 ①

입력
2003.03.26 00:00

2000년 12월 4일 경북 울진 행곡리의 주천대(酒川臺)라는 산 중턱에 67세의 한 노인이 숨져 있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 선영(先塋) 앞에서 꽁꽁 얼어 죽은 그의 이름은 장소택(張小宅). 민주사회당으로 정치를 시작한 그는 1987년 평민당 창당 때 경북에서는 드물게 발기인으로 합류한 골수 야당 인사다. 그가 생을 끊기 위해 모진 바람에 스스로를 내던졌는지, 아니면 허약해진 신체가 추위를 견디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은 주변 사람들에게 처연한 구전 설화가 됐다.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2002년 3월, 경북 울진에 들렀던 정동영(鄭東泳) 의원은 야당 출신 당원들로부터 "DJ가 비서실장에 김중권(金重權)씨를 임명하자 장소택씨가 세상을 한탄하며 자살했다"는 말을 들었다. 정 의원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뚫리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들의 얘기는 사망 시간이나 인과관계가 맞지 않는 등 다소 과장되고 부정확했지만 비서실장을 거쳐 울진 지구당 위원장, 당 대표를 맡았던 김중권과 장소택의 죽음을 연관짓는 정서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장 씨의 동생 장정윤(張正潤·공무원)씨는 "형님이 김중권씨를 직접 비난한 적은 없지만 비서실장 임명 소식에 '그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넋두리를 했다"면서 "2000년 4·13 총선에서 공천까지 못 받으면서 한을 품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처럼 김중권 비서실장의 등장은 의외이자 충격이었다. 수십 년 간 DJ만을 쳐다보며 어려운 길을 감내해온 정통파 야당 출신들에게는 어떤 의미로는 배신이기도 했다. 더욱이 김 실장이 구색용이 아니라 인사와 정보를 장악한 명실상부한 2인자로 자리잡아 가면서 충격은 점점 거부감으로 옮아갔다.

동교동계 등 DJ의 측근들은 왜 사전에 이를 막지 않았을까. 이강래(李康來) 민주당 의원은 "막지 않은 게 아니고 막지 못한 것"이라며 "김대중(金大中) 당선자는 사실상 아무하고도 상의하지 않고 임명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강래 의원은 대선 때 DJ의 비서로 당 정책자문회의 의장을 맡은 김중권 밑에서 간사로 일을 했었다.

그의 증언. "대선이 끝난 후 김광일(金光一)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 YS 정부의 마무리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고하러 당선자의 일산 자택을 찾았다. 그 때 당선자는 '자네, 김중권과 일해 보니 어떻던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젠틀하고 합리적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당선자가 '비서실장을 시키려는데 어떠냐'고 물었다. 깜짝 놀랐다. 나는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라, 몇 사람의 대안을 놓고 선택하라고 했다. 당선자는 김중권씨의 장점을 조목조목 얘기하더라.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나에게 말한 것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요식 행위였다."

DJ는 이강래와 상의한 후 이틀 뒤인 12월 25일 김중권에게 당선자 비서실장 임명을 통보하고 27일 이를 발표했다. 그 때만해도 동교동계를 비롯 국민회의 중진들은 경악했지만 그다지 항의하지는 않았다. 다른 자리도 많이 있는데다 김 실장이 얼굴마담에 그칠 것으로 낙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자와의 거리가 힘을 좌우한다'는 권력의 속성을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김 실장은 주어진 권한을 120% 쥐고 활용할 줄 아는 구여권 출신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김중권의 벽'은 하루 하루 지나면서 커갔다. 그의 실력 발휘는 작은 사안이었지만 청와대 비서진 구축에서 나타났다. DJ는 25일 일산 자택으로 김 실장을 불러 내정을 통보하면서 청와대로 데려갈 비서진 명단을 주었다.

이강래 장성민(張誠珉·전 민주당 의원) 고재방(高在邦· 교육부 차관보) 박금옥(朴琴玉·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최규선(崔圭善·구속 중) 등이었다. 이들 중 최규선은 김 실장에 의해 청와대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는 DJ의 특명이 김 실장의 논리적 검증에 의해 수정된 것으로 여권 내 권력 구도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김중권씨의 증언. "비서 내정자 5명 중 이강래에게 정부조직 개편을, 고재방과 박금옥에게는 취임식 준비를 맡겼다. 장성민과 최규선은 전문성을 몰라 한 동안 아무 일도 맡기지 않았다. 그랬더니 당선자가 '장성민에게 일을 왜 시키지 않느냐'고 물었고 '검증을 거친 후에 시키겠다'고 답했다. 그 뒤 당선자는 장성민을 두 번이나 더 챙겼다. 그래서 장성민에게 교수 공무원들의 조력을 받아 청와대 기구 개편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최규선은 만나보니 뭔가 불안해 검찰과 외무부에 조회를 했다. 학위, 사생활 등에서 문제가 드러났다. 그래서 당선자에게 보고하고 최를 만나 탈락 이유를 알려줬다. 최는 눈물을 흘리면서 경제비서관으로 일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규선의 낙마는 나중에 그가 저지른 비리로 볼 때 잘된 일이었지만, 권력의 측면에서만 보면 김 실장의 힘이 강해지는 시발점이었다. 또한 청와대 조직 개편을 통해 수석급이었던 사정, 민정, 총무기능이 법무, 민정, 총무비서관으로 낮춰져 비서실장 밑으로 들어가 김 실장은 인사와 정보, 사정을 한 손에 쥐게 됐다.

당료들의 청와대 입성도 김 실장과 박주선(朴柱宣) 법무비서관(현 민주당 의원)에 의해 걸러졌다. 김 실장은 조세형(趙世衡) 총재권한대행으로부터 청와대 근무 희망자의 명단을 받았고 전문성을 기준으로 선별했다. 이 과정에서 동교동계 중진들이 밀던 당료들조차 탈락했다. 공기업과 정부 인사에서도 당의 입김은 먹히지 않았다.

당의 불만은 점점 비등점을 향해 끓기 시작했지만 김 실장의 위치는 요지부동이었다. DJ의 신임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국정원장의 대통령 독대가 없어지고 '수첩보고'가 사라진 것도 김 실장의 힘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과거 정권에서는 안기부장이 매주 대통령과 독대, 문서 보고 외에 별도로 수첩에 따로 메모해둔 권력 내부 문제 등을 보고하곤 했다. 수첩보고는 이를 빗댄 말로, 이 보고로 낙마한 고위인사가 적지 않았다. 김 실장은 이를 알고 국정원장의 주례 보고에 외교안보수석을 배석토록 해 수첩보고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한번은 이종찬(李鍾贊) 국정원장이 동교동계가 김 실장을 비난하는 내용을 별도로 보고했는데, 나중에 DJ가 이를 그대로 김 실장에 전달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 이상 수첩보고를 하지 않았다.

DJ는 어떤 이유로 김 실장을 발탁했고 파격적으로 힘을 실어주었을까. 일각에서는 1992년 14대 대선 직전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김 실장이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대선 격려금 20억원을 전달해주고 YS 정권 시절 '20억+알파설'이 문제됐을 때 검찰 수사에서도 침묵한 것을 배경으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DJ와 김 실장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얘기다. 그게 부담이 됐거나 고마웠다면 다른 자리로도 얼마든지 보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김중권 본인의 분석. "대선 후 당선자는 12월 20일과 22일 두 차례 일산으로 불러 비서실장을 맡으라고 했다. 나는 정부 출범 때까지 두 달이나 남았으니 나중에 결정하라고 했다. 25일 세 번째 불러 내정을 통보하면서 세 가지를 얘기했다. 그 중 첫째가 영호남 화합이었다. '나는 호남이고 당신은 영남이니 힘을 합쳐 동서화합을 이루자'는 당부를 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청와대를 아는 사람은 당신 뿐이다' '당신은 대단히 우수하다'는 얘기를 했다."

동서화합의 상징적 발탁이었다는 데는 당시 청와대나 당 인사들 대다수가 동의한다. 그러나 동서화합을 도모하더라도 정권교체의 의미를 살리고 민주세력의 정통성을 잇는 인물을 택했어야 했다는 반론이 지금도 적지 않다. 인적 쇄신 없이 개혁도, 시대 변화도 한계를 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DJ의 평가처럼 상당한 역량을 보여 주었지만, 정통성을 갖지 못하고 뿌리가 달랐기 때문에 끊임없이 권력 내부의 갈등과 균열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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