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 브라질리아 - 김민정

입력
2003.01.03 00:00

등장인물아비 60대,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인다.

어미 50대, 맹목적이고 의지 박약하다.

딸 20대 초반의 나이, 불만과 욕구에 가득 차 있다.

남자 20대 후반의 나이, 깡마르고 기운 없어 보인다.

시간

이 극은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공간

무대는 거대한 구식 재봉틀. 딸이 재봉틀을 돌릴 때마다, 곧 무너질 것처럼 낡은 집 전체가 조금씩 움직인다.

1장

어두운 무대 위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 규칙적으로 들린다. 조명 밝아지면, 방 한켠에서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딸. 곁에는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쓰고, 경전을 읽고 있는 어머니.

딸 어머니, 조금만 쉬었다 해요.

어미 아직 해도 지지 않았잖니.

딸 하지만 전 손이 저려 더이상 할 수가 없어요.

어미 넌 매사가 그렇지. 하는 일마다 불만이야. 그래서 이 세상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어.

딸 하지만 어머니, 하루 종일 재봉틀 앞에서 일을 해야 하는 젊은 숙녀라면 누구라도 저처럼 생각할 거예요.

어미 네가 박음질하는 팬티를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상상해봐.

딸 (생각하려다가) 난 거리에 나가본지도 오래 됐어요.

어미 고층빌딩의 주인도,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도 네가 만든 팬티를 입는 거야. 그 중에는 말이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도 있을 거다.

딸 어머니, 저도 이 팬티를 입고 피아노를 치고 싶어요.

어미 네 본분을 잊지마. 넌 이 팬티를 박음질하는 사람이야. 하지만 꿈은 꿀 수 있지. 이 작은 팬티 한 장이 결국엔 말레이에 공장을 세우고, 아프리카에 빌딩을 지을 거다.

딸 하지만 제게 돌아오는 것은 고작 한 달에 15만원인 걸요.

어미 브라질에 대수로만 뚫린다면야 이깟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지.

딸 수로가 언제 뚫리는데요?

어미 그거야 네 아버지만 아시는 일이다.

딸 아버지가 누구죠?

어미 브라질에서 대수로 공사를 하고 계신 분이 바로 네 아버지야.

딸 브라질은 어디에 있죠?

어미 글쎄, 학교에 안 다닌 지 너무 오래 돼서 잘 모르겠구나.

딸 학교에 가면 브라질로 가는 길을 알려주나요?

어미 (딸이 바느질한 옷을 보면서) 멍청이. 어디 하나라도 제대로 해 봐. 쓸데없는 생각만 하니 바느질이 이 모양이잖니? 이러면 일당을 받을 수가 없어!

딸 알아요, 어머니. 하지만 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잖아요.

어미 학교야 언제든 갈 수 있지.

딸 대수로가 완성되면, 전 이 세상의 모든 재봉틀을 때려부수겠어요.

어미 아예 이 방까지 허물고 학교라도 세울 기세구나.

딸 아.(손가락을 찔린다) 어머니, 피가 나요.

어미 오늘 일감을 망칠 작정이야?

딸 아니에요. (사이) 이제야 손이 저린 게 개었어요. 다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미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냥 손을 움직이는 거야. (딸에게 시범동작을 해 보이며) 이렇게 리듬을 타며, 더 빠르게. 내가 젊었을 땐 하루에 열 박스씩을 박았단다. 이젠 눈도 어둡고 손도 굳어서 더 할 수 없는 게 아쉽다.

딸 알았어요, 어머니. 제 처지가 그러니 어쩔 수 없죠. 어머니는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에 맞춰 경전이나 읽어 주세요.

(다시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 한참 후.)

어미 좀 조용히 해봐. 무슨 소리가 들리잖니.

딸 무슨 소리요? (재봉틀에 귀를 대보며) 어디 이 안에서 실밥 꼬이는 소리라도 들리나요.

(어미, 문 쪽으로 귀를 대본다. 재봉질 멈춘다. 사이. 노크 소리 들린다.)

딸 우리 집인가요? 물건 받으러 오는 날은 내일인데요.

어미 넌 가만 있거라. 내가 나가 보마.

딸 그 돋보기는 벗고 나가세요. 누구라도 보면 놀라겠어요.

어미 (나가서 문 열고) 누구…세요?

(바깥에 아비가 서 있다.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

아비 내가 제대로 찾았군. 의심스럽게 치켜 뜬 눈꼬리가 꼭 당신이야.

어미 아, 믿을 수가 없어요. (사이) 당신, 돌아왔군요. 얘야, 나와봐라. 네 아버지가 오셨다.

딸 아버지요? 아버지가 오셨다구요? (달려나간다)

어미 인사드려라.

딸 하지만 어머니, 거리는 너무 조용한 걸요. 아버지가 브라질에서 돌아오시는 날엔 거리엔 차들이 행진하고 하늘엔 불꽃놀이가 펼쳐질 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딸, 어미와 눈을 맞춘다. 점점 믿을 수 없어진다.)

딸 (아비를 보고) 당신이 우리 아버지인 걸 어떻게 믿죠?

어미 일단 들어와봐요.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아비, 들어온다. 중절모에 지팡이를 짚은 아비는 백발 노인이다. 아비,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서성이고 있다.)

딸 여기 제 자리를 내어 드릴께요.

어미 (자기 자리를 내주며) 아니, 여기에 앉아요. 당신이 내 남편이 아니라면 딸애는 계속 재봉질을 해야 할 테니.

아비 (앉으며) 18년만의 재회 치고는 너무 매정하구만.

딸 어머니, 이상해요. 제 아버지라기엔 너무 늙었어요.

어미 그 모자 좀 벗어봐요. (아비, 모자를 벗는다.)

어미 당신, 참 많이 늙었구려.

아비 (허풍스럽게 웃으며) 거리의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변장을 하고 온 거요. 수염을 깎고 염색을 하면 이십 년은 젊어 보일 걸.

딸 왜요? 훈장이라도 달고 오실 줄 알았는데….

아비 저 아이가 내 딸인가. 참 많이 컸구먼 그래.

딸 어머니, 우리가 보낸 편지에 대해 물어보세요.

딸 딸아이가 보낸 편지는 받아보셨어요?

아비 열 살 때 보낸 편지 말이요? 읽고 또 읽어 봤지. 그런데 네 글씨는 도통 알아볼 수 없더구나. 하지만 글솜씨보다 재봉솜씨가 훨씬 낫다니 흐뭇하다.

딸 우린 아버지의 대수로 공사를 위해서 밤낮으로 일했어요. 연필을 잡을 기회는 아버지께 돈을 부치는 날 뿐이었죠. 아버지란 이름은 제 기억엔 없어요. 하지만 브라질의 대수로 공사를 맡고 계신 분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확실하죠.

아비 그래, 내가 그 브라질의 대수로 공사 현장에서 오는 길이다.

어미 꿈만 같네요. 우린 방금 전까지도 이렇게 앉아 당신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이 아이는 재봉틀을 부수고 이 자리에 학교를 짓겠대요.

아비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딸 하지만, 도무지 브라질에서 오신 분 같지 않아요.

아비 그곳은 이곳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니 낯설어할 것도 없지.

어미 (감격스러워) 여보, 저를 안아주세요. (아비, 어미를 안는다.)

어미 더 꼭이요! (아비, 어미를 꼭 안는다.)

어미 아, 이제 됐어요. 18년 전 당신을 떠나보내던 그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아요.

딸 (아비와 어미의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제가 보내드린 돈은 도움이 됐나요?

어미 (아비에게서 떨어져 나오며) 여보, 대수로는 완성됐어요?

아비 뭐 좀 먹을 게 없을까? 집을 찾아 헤매느라 배가 다 꺼졌어.

딸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어미 이 야박한 것아, 늬 아비야. 우리 집에 있는 건 아낌없이 드려야지.

딸 아까 남겨놓은 빵 한 조각밖에 없는 걸요. 그건 야참으로 먹으려고 놔둔 거라구요.

어미 이제 더 이상 야참이 필요 없을 테니 어서 꺼내와.

(딸, 찬장에서 빵조각을 꺼내와 아비 앞에 놓는다.)

어미 내일은 기름진 밥상을 차릴께요.

딸 어머니와 전 빵 한 조각을 가지고도 이렇게 살았어요. 항상 끼니의 삼분의 일을 남겨두죠. 남겨둔 조각은 배고파 더 이상 일을 못 할 때를 대비해 남겨두는 거예요. 하지만 우린 배고파 일이 안 될 때에는 아버지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고 참아요. 아버진 더 힘든 날을 보내고 계신다니까. 그러다가 그 조각에 곰팡이가 슬어 그냥 버린 적도 있어요.

어미 여보, 나는 곰팡이 난 빵을 숱하게 먹었지만 내 위는 끄떡없었어요. (딸에게) 봐라. 오늘 같은 날이 오면 배고픈 날도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되잖니.

(아비, 게눈 감추듯 빵조각을 먹어치운다.)

딸 공사는 다 끝났나요?

어미 여보, 어서 브라질 얘기를 들려주세요.

아비 공사는, (입을 닦으며) 이제 끝이다.

어미 (환호성을 지르며) 끝났어요? 당신, 해냈군요! 당신이 드디어 해냈어요! 여보, 난 당신의 성공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딸 (기대에 차서) 우린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아비 같이 사는 거야.

딸 어디서요?

아비 여기서.

어미 여기서요?

아비 (딸과 어미를 번갈아 보며) 그래.

딸 대수로 공사가 끝나면….

어미 당신은 나한테 좋은 집을 지어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비 그랬었지.

딸 전 학교를 짓고 싶어요.

아비 그것도 훌륭한 생각이다만, 당장은 안 된다.

딸 대수로 공사가 끝났는데두요?

아비 더 이상 돈이 없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어미 중단되다니요? 그럼 제가 보내드린 돈으로는 무얼 하셨나요?

아비 관을 연결할 나사를 샀지.

어미 어이구, 그게 어떻게 번 돈인데 고작 나사 몇 개 사다니….

아비 아니야, 그 나사가 없었으면 공사는 시작도 못했어.

딸 제가 열 살 때 보내드린 돈은요?

아비 바퀴에 칠할 기름 한 통을 샀지.

딸 열다섯 살 때 보내드린 돈은요?

아비 면장갑과 신발끈이 필요했다.

어미 그럼 지난 달에 보내드린 돈은 어쨌어요?

아비 덕분에 비행기 티켓을 사서 집으로 올 수 있었지.

어미 (주저앉으며) 아, 그럼 결혼할 때 가져온 내 고급 시계는 어떻게 된 거죠? 내 호화로운 옷들은….

아비 땅을 파고, 관을 묻고, 다시 그 관을 연결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18년을 뚫어도 대수로는 완성되지 않더구나. 우린 땅 속에서 길을 잃었지.

딸 우리라니요?

아비 함께 간 사람들. 브라질 전역에 대수로 공사를 해서 주인이 돼보겠다는 동지들 말이야.

딸 그럼 어머니랑 전 이제 어떻게 하죠?

아비 여기서 같이 살자.

딸 여긴 셋이 살기엔 너무 비좁아요.

어미 여보, 난 눈도 침침하고, 손끝이 저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요. 아픈 데도 한두 군데가 아닌데 꾹 참고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구요.

아비 걱정 마. 아직 인생은 끝난 게 아니라구. 아, 이제 피곤하다. 어디 누워서 자야 하지? (잠꼬대처럼) 한 3, 4년만 더 뚫으면 수로가 완성될 수도 있을 텐데…. 누군가 조금만 돈을 대 준다면….

어미 난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아, 숨이 막혀…. 당신은 그냥 아무데서나 주무세요. 좁다고 불평은 말아요. 우리도 이렇게 살았으니.

딸 안녕히들 주무세요. 밤새 브라질 수로 공사 하는 꿈이나 꾸시구요. 전 내일 아침이면 물건을 받으러 오기 때문에 재봉틀을 돌려야 해요. 아버지 때문에 시간만 빼앗겼잖아요. 내일 밥상에 고기라도 올리려면 서둘러 재봉질을 해야 해요.

(딸, 신경질적으로 재봉틀 돌린다. 어미, 자리에 눕고, 아비, 집이 흔들리자 불안해한다. 어두워진다.)

2장

날이 밝으면 딸은 힘겹게 재봉틀을 돌리고 있고, 어미는 좁은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아비 (문밖에서) 여보, 내가 돌아왔소. 아무도 없나?

어미 (벌떡 일어나며) 얘야, 누가 왔다. 좀 나가 봐.

딸 (재봉질 멈추고) 나가요.

어미 누구냐? 늬 아비냐? 브라질에서 온다던 늬 아비야?

딸 아버지가 돌아오신 지는 닷새가 넘었어요. 아버진 외출하고 돌아오신 거예요.

어미 (다시 누우며) 그렇지. 브라질에서 온 지 한참 됐지.

딸 (문 열어주며) 들어오세요.

아비 이 짐들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상자를 건네주며) 짐들 먼저 옮겨줄래?

딸 이것들은 다 뭐예요?

아비 아직은 그냥 상자일 뿐이다. 하지만 때가 되면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려주마.

(아비, 상자가 다 옮겨지고서야 들어온다.)

아비 하루종일 어떻게 지냈냐?

딸 늘 하던 일을 했어요. 손목이 휘도록 했는데도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팬티에 단추 다는 것은 누구의 발상인지, 손이 두 배로 가잖아요.

아비 너무 신경질 부리지 마라. 머지 않아 넌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 거야.

딸 누가 단춧구멍 뚫는 재주를 알아주기나 한대요?

아비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야 되니. 항상 미래에 다가올 일을 생각해라.

딸 꼭 어머니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비 늬 엄마 기분은 나아졌니?

딸 아주 예민해져 있으니 조심하세요.

어미 (침대에 누운 채로) 여보, 나 아직 살아있어요.

아비 그래, 다행이구만. 내가 당신에게 주려고 선물을 샀어. 일어나 봐.

(어미, 일어나 앉는다.)

아비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백화점에 갔는데 에프 브랜드 매장 주인이 날 알아보는 거야. 자세히 봤더니 팔 년 전 우리 현장에서 일하던 녀석이지 뭐야. 그때는 매일 애인 보고 싶다고 찔찔 울기나 하더니 어느 새 매장 사장이래. 수출 1위의 팬티라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당신 주려고 하나 샀지.

딸 (상자 속의 팬티 꺼내들고) 어머니, 이건 제가 만들었던 팬티에요. 기억나세요?

어미 이 일을 너 혼자 한 것도 아닌데, 그 많은 것 중에서 네가 만든 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니?

딸 확실해요. 이 가장자리의 박음질을 세모꼴로 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구 그랬어요. 이건 제 방식이라구요.

어미 참 신기한 일이구나. 우리는 힘들 때면 우리가 만든 팬티를 입을 사람들을 상상해 봤었지. 그런데 그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되다니….

아비 어디 한번 입어보구려.

딸 아버지, 이거 얼마 주고 사셨어요?

아비 15만원.

딸 아버지, 15만원이면 우리가 밤새워 한 달을 일하면 겨우 받을 수 있는 돈이에요.

어미 뭐라고?

아비 여보! (기절하는 어미를 아비가 붙잡는다)

어미 이런 순 날강도들. 당신이 바가지를 쓴 거예요.

딸 어머니, 이 팬티 입지 마세요.

아비 큰 돈 주고 사온 팬티를 왜 못입게 해?

딸 이건 우리 양식이었어요. 브라질 공사의 밑천이자, 어머니의 꿈이었잖아요.

어미 (팬티를 품에 품고 점점 울상이 되어) 그래, 이 신성한 것이 속옷이 되어 내 분비물을 받아내게 할 순 없지. 안 입을 거다. 어떻게 입을 수 있겠니.

아비 왜들 하필이면 팬티 만드는 일을 해 가지구. 모자나 코트 만드는 일도 있었을 것 아냐.

어미 어찌됐건 고마워요. 난 가서 저녁이나 차려오마. (비틀거리며 나간다)

아비 늬 어민 너무 약해졌구나. 걸을 때조차 엉덩이가 처져 있어.

딸 어머니는 희망을 잃으신 거예요.

아비 혼자 살아서 그래. 여자 혼자 집안에서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었겠냐.

딸 며칠 전까지 온 몸에 기운이 넘치셨죠. 하지만 다행이에요. 덕분에 전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났으니까요.

(딸, 다시 재봉틀을 돌린다. 아비, 갑자기 짜증이 난다.)

아비 좀 조용히 할 수는 없냐?

딸 멈출 수는 있어도 소리를 줄일 순 없어요.

아비 그럼 잠깐 멈춰라. 식사 때까지만이라도.

딸 (재봉질을 멈추고) 아버지가 하실 일을 생각해 봤어요.

아비 무슨 일 말이냐?

딸 뭐든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야죠.

아비 그래야지.

딸 아버지, 운전하실 줄 아세요?

아비 그걸 말이라고 하니? 내가 재규어를 몰고 상파울루 도로를 질주할 때면 마을 사람들이 다 환호를 했단다. 나중엔 그 재규어를 모두 해체해서 공사 재료로 써야 했지만.

딸 그렇다면 조금 큰 트럭도 운전할 수 있으시겠네요. 내일 물건을 내려주러 트럭이 올 거예요. 그 차를 타고 가서 면접을 보세요.

아비 그 일을 하면 뒷마당에 전용 비행장을 만들 수 있냐?

딸 10년을 해도 안 될걸요.

아비 아니면 평생 연금으로 살만큼 퇴직금이 두둑하냐?

딸 기대하시는 만큼은 아닐 거예요.

아비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지? 일이란 장래성이 있어야 하는 거야.

딸 하지만 하루 두 끼 식사는 보장해 주죠.

아비 이 세상엔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있다.

딸 그게 뭔데요?

아비 인간이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우주를 항해하는 이유를 모르겠니?

딸 아버지는 굶어본 적이 없으시군요. 하긴 우리가 늘 밥값은 보내줬으니까요.

어미 (세 개의 그릇을 들고 나오며) 다들 밥이나 먹자.

아비 오늘 저녁 메뉴는 뭐지?

어미 멸치국이에요. 그릇마다 멸치 한 마리씩을 넣었어요. 잘 건져 드세요.

(다들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한다.)

딸 어머니, 식사 기도를 잊으셨어요.

어미 이제 기도 따윈 하지 않을 거다. 난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졌으니….

딸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그래도 어머니에겐 남편과 새 팬티가 생겼잖아요.

아비 브라질에선 멸치국에 멸치를 열 마리씩이나 넣어 먹었었는데, 일꾼들은 항상 그것도 모자라서 파업을 해댔지.

어미 내가 만든 음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아비 아니, 나는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거야.

딸 어머니, 국이 맑아서 멸치가 돌아다니는 게 아주 잘 보이네요.

어미 (흐뭇해진다) 고맙다. 난 국에 아무 양념을 하지 않고도 맛을 낼 줄 안단다. 누가 내 멸치 좀 먹지 않을래?

딸 왜요?

어미 이놈의 멸치가 날 보며 애원을 하는구나. 나한테 먹히긴 싫은 모양이다. (아비의 그릇에 한 숟갈 떠 주며) 자, 당신이나 먹어요.

딸 어머니, 편식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성질만 더 나빠지게 한다구요.

어미 난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기운이 없으니, 먹는 것도 줄이겠다.

딸 그렇다면 아버지가 드세요. 아버지도 앞으로 일을 하려면 몸이 건강해야 해요. 뼈가 부실해서 일자리를 잃는 일 따윈 없어야죠.

아비 (그릇을 다 비우고) 식사시간이 너무 짧구나. 가족들이 모여 앉아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아니냐.

딸 국물이 있을 때는 그나마 긴 거예요.

아비 멸치국을 먹었더니 입이 비리다. 시원한 맥주나 한 잔 마시고 싶구나.

딸 저희 집에 맥주가 어딨어요? 냉장고 문을 열어보세요. 고래라도 들어갈 만큼 텅 비었어요.

아비 집에 시원한 맥주 한 잔도 없단 말야?

(어미, 다시 기절한다. 아비, 쓰러지는 어미를 일으킨다.)

어미 여보, 소리지르지 마세요.

딸 아버지, 여긴 브라질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부리던 일꾼들은 이제 없다구요.

어미 난 기운이 없어 좀 누워야겠어요.

딸 아버지, 저 서랍 속에 있던 도장이 없어졌는데 혹시 보셨어요?

아비 글쎄다. 검정색 뿔도장 말이냐?

딸 예. 그거예요.

아비 어디 멀리 갔겠냐.

딸 통장에 있던 돈도 얼마 안 남았던데요?

아비 다 늬 어미를 위해서야. 18년간 나를 기다린 수고를 어떻게든 보상해 주고 싶다.

딸 아버지가 매일 저 상자들을 사다 나르시는 바람에 저희는 곧 굶게 될지도 몰라요.

아비 이제 곧 저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게 될 거다.

딸 아버지는 숨기는 게 너무 많으세요. 도무지 아버지 말씀은 믿을 수가 없군요. (아비, 상자를 열어보며 흐뭇해한다.)

딸 그 안에 뭐가 있죠?

아비 수많은 숫자들.

딸 얼굴빛이 달라지신 걸 보면 아버진 또다른 꿈을 찾으셨군요.

아비 난 밤새 이 숫자를 셀 거다. 이 숫자를 다 세고 나면, 세상은 달라져 있을 거야.

딸 아버지가 오시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어요. (원망하듯) 아버진 제 손을 보기라도 하셨어요. 늘 손톱엔 때가 끼어있고, 손끝도 뭉툭해졌어요.

아비 넌 아직 한창 일할 나이야.

딸 그렇죠. 하지만 가끔은 데이트도 하고 싶고, 근사한 곳에서 와인을 마시고 싶어요.

아비 요즘 젊은 것들이란, 세월이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고 놀 궁리만 하다니.

어미 왜 재봉틀을 돌리지 않는 거지?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구나.

딸 알았어요.

(딸, 기계적으로 재봉틀 돌리고, 아비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아비 1029384, 1029385, 1029386, 1029387, 102938… 아, 그 재봉틀 소리, 그만 둘 수 없니?

딸 전 멈출 수 없어요.

어미 여보, 저를 그냥 잠들게 놔두세요.

아비 2837104, 2837105, 2837106, (한숨을 쉰다) 도대체 저 소리 때문에 숫자를 셀 수가 없어. 아, 브라질까지 들렸던 저 소리….

딸 아버지, 제 힘으론 발을 멈출 수 없어요. 실이 엉키지 않게 계속해야 하거든요. 고장이 나면 당장 일을 할 수가 없잖아요.

아비 저 소리가 머리를 짓이기는 것 같다. 5분만 쉬면 안 되겠니?

딸 정 그러시면 아버지 손으로 이 재봉틀 좀 멈추게 해 주세요. 제발요.

(아비, 연장을 들고 딸에게로 간다.)

어미 (벌떡 일어나며) 여보, 안돼요. 그건 세상이 돌아가는 소리에요. 그냥 시계 초침 소리 같은 거요.

아비 하루 정도 멈춰있다고 지구가 멸망하진 않아.

(어미, 재봉틀을 향해 달려간다. 아비, 연장으로 재봉틀을 내려친다. 재봉틀 소리 멈춘다. 어미, 기절한다.)

3장

다시 날이 밝으면, 어미의 머리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아비. 집안 구석구석 재봉틀 부속이 널브러져 있고, 집 구조도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아비 내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오?

어미 아니오. 가장으로서 할 도리를 한 것이지요.

아비 난 딸아이에게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싶었던 거요.

어미 하지만 그 아인 당신이 온 뒤로 더욱 버릇이 없어졌어요.

아비 반항심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어. 그건 새로운 창조의 힘이 될 수 있거든.

어미 하긴 그 아이도 스물이 넘었는 걸요. 그 나이엔 누구나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다고 너무 어린아이 취급 하진 마세요.

아비 그 아일 어린아이 취급한 건 당신이오.

어미 제가요? 난 그런 적 없어요.

아비 나간 지 겨우 10분밖에 안됐는데도 이렇게 불안해 하잖소.

어미 하지만 딸아인 이렇게 오래 외출한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길어봐야 3분. 언제나 물품 수거반은 제시간에 정확하게 왔으니까요.

아비 그 아이에게도 어느 정도는 자유가 필요해.

어미 퍽이나 인간적이시군요. 그 아인 내가 잘 알아요. 잠시라도 재봉틀 앞을 떠나면 얼마나 불안해 했다구요.

아비 떨지 말고 가만히 있어봐. 자꾸 움직이니 상처를 제대로 가릴 수 없군.

어미 날 겁주지 말아요. 어지러우니 날 좀 눕게 해 줘요.

(아비, 어미를 침대에 눕힌다.)

아비 여보,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야.

어미 브라질에서 대통령이라도 오시나요?

아비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봐. 바로 자식 문제로 다투고 있잖아. 처음이야. 내가 브라질에서 이런 날을 얼마나 상상했는지 알아? 난 모든 시나리오를 짜놨지. 딸아이가 부모 말을 안 들었을 때, 도둑질을 했을 때, 거짓말을 했을 때 나는 딸아이를 혼내고, 교육을 문제삼아 당신과 말다툼을 하는 거야. 그러다가 우는 딸아이의 볼기짝을 때리고, 당신에게 접시를 던지고, 급기야는 집의 모든 물건을 깨부수기 시작하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살맛나는 일이야.

어미 당신이 브라질에서 어떤 생각을 했든 난 상관 안해요.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이 브라질에서 돌아왔다는 것. 우리의 생활이 더 이상 좋아지지 않을 거란 사실이에요.

아비 당신은 너무 예민해졌어. 휴식이 필요해.

어미 요즘 나는 잠자리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해요. 당신이 브라질의 수로관에 왜 자신의 무덤을 파지 않았을까. 당신이 어떻게 태평양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을까. 당신이 어떻게 아침마다 내 곁에서 무사히 눈을 뜰 수 있을까. 내가 조금만 기운이 있다면 당신의 급소를 벌써 찔렀을 거예요.

아비 그래? 그럼 우린 생각을 이제 실행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군.

어미 내가 못할 것 같아요?

아비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칼을 들이대는 그 순간에 후회하게 될 걸?

어미 왜요?

아비 당신은 브라질의 대염원인 수로 공사의 주인을 영원히 잃게 될 테니까.

어미 그 수로 공사 막 내린지가 언젠데, 내가 다시 속을 것 같아요?

아비 믿지 않으면 당신만 손핼 걸. 저 상자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 바로 브라질로 가는 길, 밀림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지도, 비행기와의 약속 시간… 이제 동지만 구하면 돼. 난 다시 브라질로 갈 거야.

어미 그게 정말이에요?

아비 눈으로 보여줘야 믿겠소? 이 집은 우리 세 식구가 살기엔 너무 비좁아. 내가 브라질로 가면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거요.

(딸,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다.)

딸 하지만 아버지.

아비 이제 오니? 네 에미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알아?

어미 아버지가 브라질로 다시 가신다는구나. 기쁘지 않니? 그런데 너, 왜 빈손이니? 새 일감은 안 받아왔어?

딸 예. 전 더이상 일을 할 수 없어요. 아버지가 다시 브라질로 간다 해도 난 다시 재봉틀을 돌리지 않겠어요.

어미 그게 무슨 소리냐?

딸 전 결혼을 할 거예요.

어미 결혼? (머리를 감싼다) 네가 남자를 알기나 해?

아비 여보!

어미 또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괜찮아요.

딸 이제 그만 들어오셔도 돼요.

(남자, 들어온다. 일꾼 복장에 깡마르고 수줍어하는 청년이다.)

딸 이 사람이에요, 저랑 결혼할 남자가. 인사 드려요. 이쪽은 18년간 브라질 대수로 공사를 하다 땡전 한 푼 없이 돌아온 아버지, 이쪽은 재봉틀을 온 몸으로 지켜내다가 머리통이 깨진 어머니.

(남자, 말없이 꾸벅 인사한다.)

아비 아직 어린애 아니냐?

딸 몇 살인지는 모르겠어요.

어미 그래,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 관두자.

아비 조금 전까지 우리는 네 문제로 다퉜단다. 그리고 너를 보다 존중하고 이해해 주기로 했지. 네가 결혼을 하겠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지만, 어디 얘기나 들어보자.

어미 들어와 앉아요.

(어미, 아비 나란히 앉는데 빈 자리가 없다.)

딸 모두 앉기엔 자리가 비좁아요.

남자 제가 서 있겠습니다.

아비 아니야, 그럴 수는 없지.

어미 넌 가서 먹을 것을 좀 내 와.

딸 (부엌으로 가며) 뒤져봐야 별 거 없을 텐데요.

어미 보시다시피 우리 딸아이는 이제 다 컸지요. 재봉질도 아주 잘 한답니다. 그만하면 사내에게 여자 구실도 잘 할 거구요. 우린 딸아이의 행복을 바라지만, 부모로서 딸아이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 최소한의 판단은 해야겠어요.

남자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어미 우리 딸아이와는 언제 만났죠?

남자 10년 전에 만났습니다.

어미 어떻게 만났는데요?

남자 245-19호! 하고 부를 때마다 달려 나오더군요.

어미 무슨 일로 우리 아이를 불러냈나요?

딸 (그릇을 가지고 나오면서) 거기 옷에 박혀 있는 글씨를 보면 몰라요? 에프라고 써 있잖아요. 그건 제가 일하는 회사 상표에요.

어미 넌 잠자코 있어.

남자 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 에프 회사의 물품 수거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각에 따님의 얼굴을 봐 왔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우린 서로 물건을 주고받으며 눈빛을 마주치죠. 그때 알았습니다. 따님의 영혼이 얼마나 순수한지를요. 따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어미 (실망한 표정으로) 그럼 내 딸의 영혼과 결혼을 하구려.

아비 이번엔 내가 물어볼 차례야.

어미 (자리에서 일어나 딸에게) 넌 이리 좀 와봐.

아비 자네는,

어미 여보, 좀 더 공격적으로 질문해요. 이 남자는 우리 딸아이의 인생을 흔들어놓은 사내라고. 그렇게 부드럽게 대해선 안 돼요.

딸 어머니, 전 이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어미 저 남자는 아무 것도 너에게 약속할 수 없다. 척 보면 모르겠니? 평생 널 고생시킬 거야.

딸 평생 재봉틀만 돌리고 사는 것보단 나을 것 아녜요.

어미 너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릴 남자야.

딸 떠나지 못하게 제 곁에 꽁꽁 묶어둘 거예요.

아비 (남자에게 고압적으로) 자네는, 중국의 대 미국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딸 아버지,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요?

아비 넌 가서 술을 가져와.

어미 너무 겁 주지 말고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요.

(어미, 딸을 데리고 부엌으로 간다. 남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비 이런 멍청이를 봤나. 뭐든 자기 주장이 필요해. 어서 말을 해봐. 지구가 온난화되는 데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지? 얼마만큼의 양식이 아프리카에 원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딸, 술을 가져온다.)

딸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냥 에프 회사의 성실한 일꾼이라 잘 모른다고 하세요.

아비 (남자에게 술을 따라주며) 자, 마시면서 잘 생각해봐.

남자 (술을 마시자 용기가 나서) 중국은, 미국에 대해 아무 정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고 생각합니다.

아비 (술을 따르며) 자넨 패기가 부족해. 배꼽 밑에 힘을 더 주라고. 사내녀석이 그래서야 여자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겠나.

남자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조금 더 큰소리로) 지구가 온난화되는데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다, 고 생각합니다.

아비 (다시 술을 따르며) 더 남자다운 발언을 하란 말야.

남자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쌀 한 톨의 양식이라도 더 아프리카에 원조되어야 한다, 이상입니다.

아비 그게 순수한 자네의 신념인가?

남자 그렇습니다.

아비 자네는 브라질의 대수로 공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남자 그것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아비 왜 그렇지?

남자 그곳이 브라질이기 때문입니다.

아비 아, 그래. 자네가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아직은 부족해. 자넨 사내의 포부가 뭔지 몰라. 인생은 한 판 승부 아닌가. 목숨 걸고 얻고자 하는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거야.

남자 전 다만, 따님의 마음을 평생 제 곁에 두고 싶습니다.

아비 자네는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아나?

남자 …

아비 그걸 알면 자네가 그깟 사소한 고민을 하고 있을 리 없지. 자네의 이상이 뭔가?

남자 따님의 행복입니다.

아비 여자들은 이상이 높은 남자를 좋아하네. 이상이 없으면 여자는 곧 떠나버려. 이상이 높을수록 여자는 남자에게 쩔쩔 매지. 자네는 더 높은 이상을 가져야 돼. 자, 다시 말해 봐. 자네의 이상이 뭔가?

남자 따님에게 매일 다섯 가지 반찬이 있는 아침상을 차려 주겠습니다.

아비 조금 더 높게!

남자 따님의 통장에 매일 만 원씩을 선물하겠습니다!

아비 더 높은 이상을!

남자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습니까?

아비 브라질에 간다고 하게. 그럼 딸아이는 자네 것이 될 걸세.

남자 따님과 함께 가는 겁니까?

아비 함께 가면 지긋지긋한 고생만 있을 뿐이야.

남자 하지만, 전 행복한 가정을, (술을 마시려는데 술잔이 비어있다.)

아비 여보. 술을 더 가져와.

어미 (딸과 함께 나오며) 좀 천천히 마셔요. 술이 바닥났어요.

아비 여보, 난 내 딸의 결혼을 축복하겠소. 이 사내는,

남자 (딸의 손을 잡고) 난 브라질에 가겠어요.

아비 브라질에 갈 거요. 나와 함께.

어미 (쓰러질 듯) 여보, 당신한테 맞은 머리가 아파와요.

딸 결혼은 어쩌구요.

남자 식은 브라질에 다녀와서 올립시다.

딸 브라질이 얼마나 먼 지 알아요? 한번 갔다 오는데 18년이 걸리는 곳이라구요.

남자 당신 앞에 더 높은 이상을 갖고 오겠어요.

어미 여보, 그건 너무 일러요. 살아보지도 않고 떠나보내는 건 위험해요.

아비 난 떠날 준비를 마쳤어. 저 상자 안의 숫자들, 함께 일할 동지,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까지.

남자 저도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비 그럼 주저할 게 뭐 있나. 가세. 브라질로 가는 헬기가 뒷마당에 도착했을 거네.

(헬리콥터 날개 돌아가는 소리. 아비, 상자를 들어 옮기기 시작한다.)

어미 여보, 작별인사 할 시간은 주셔야죠.

남자 날 기다려 주겠소? 내가 브라질에서 돌아오면 바다 위에 집을 짓고 별같은 자식들은 모래밭에 풀어놓고 웃으며 삽시다. 당신을 이 세상 최고의 부인으로 만들어주리다.

(딸, 힘없이 재봉틀 앞에 앉는다.)

딸 아무 약속도 하지 말아요. 아무 기대도 하지 말아요. 눈도 마주치지 말고, 손도 잡지 말아요.

(남자, 아비의 뒤를 따라 나간다.)

어미 (뒷모습을 보며) 여보, 편지할게요. 열심히 일해 돈도 부칠 거구요. 하지만,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요. 여보, 절 잊지 마세요.

(헬리콥터 떠난다. 딸은 재봉틀을 돌리기 시작한다.)

딸 어머니,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실밥이나 튿어주세요. 우린 내일 먹을 양식을 위해 일을 해야 해요.

어미 (아비가 떠난 허공에 대고) 여보, 머리가 아주 맑아졌어요. 제 머리 속에도 브라질 가는 길이 보이는군요.

(딸이 재봉틀을 돌릴 때마다 집안이 조금씩 무너져간다. 막이 내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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