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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천사의탈을 쓴 ‘일본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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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아시아 인식>이란 책을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국민의스승’이라고 추앙 받는 인물이 정말 그런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인물일까.아니면 천사의 탈을쓴 악마였을까. 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왜 사후 100년에야 이루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그의 진면목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에 관한 연구는 어느수준일까….
이런 의문들이 끝없이 이어지다가 오늘의 일본이 지향하는 정치대국 군사대국의 뿌리가 무엇이며, 왜 후쿠자와 재평가 작업이 늦었는지를 짐작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우경화에저항하는 우리의 밑천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일본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더구나 그가 설립한 대학과 인연을 갖고있는 사람으로서 소임을 다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만 하다.
지난 연말 나고야 대학 야스카와쥬노스케(安川壽之輔) 명예교수가 쓴 이 책은 현대 일본인에게 투영된 후쿠자와의 모습이 얼마나 미화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한론자로 알려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金玉均) 일파를 도와 한국의 개화를 위해 힘써 준 ‘고마운 인물’로 인식되는 것은 개화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근대사 저술들의 방향 때문이리라.
거기다 유길준(兪吉濬) 이광수(李光洙) 같은 선각자들에 의해 정신적 스승으로추앙 받은 일이 그에 관한 인식을 왜곡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많은 저술과논설을 통해 빨리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주장과 행동이 일본정부에 의해 어떤 정책과 조치로 나타났던가 하는 문제에 이르면, 왜 우리가 국권을 잃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강화도 조약, 동학군 토벌, 임오군란, 갑신정변 같은 근세 한일관계사의 이면에는언제나 후쿠자와의 음험한 야심과 책동이 있었다. 그 것은 언제나 일본의 침략과 외교정책으로 결실되었다.
1882년 그가 창간한 지지신보(時事新報)의 사설은 그가 독점 집필하다시피했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한국과의 개전을 주장하는 사설이 외무성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두 번이나 사설 없이 발행되었을 정도다. 발행정지 처분도있었다.
그가 얼마나 전쟁광이었는지 한 대목만 보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즉시 출병해) 조선 경성의 지나(중국)병을 몰살하고…해군과 육군을 대거지나에 투입시켜 북경성을 함락 시키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은 “수도뿐만 아니라 중국 400주를 유린하라”고 요구했으며, 천황의친정준비를 촉구하는 다음 날 사설에서는 “천황의 위세로써 아군의 대공(大攻)을 기하는 것이 만전의 책”이라하였다.
“조선인에게는 나라의 멸망이야말로 행복”이라는 망언도 서슴지않았다. 말로만 한 것이 아니다. 갑신정변 때는 김옥균 일파의 거사를 돕기 위해 수십 자루의 일본도와 폭약을 보냈으며,뒤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재판정에 불려나가기도 했다.
야스카와 교수는 그의 책 서문에서일본이 왜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에서 쇼와(昭和) 파시즘의 길을 갔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의 민주주의가 왜 전쟁국가의 길로 귀착되었는지를 묻고 있다.
침략전쟁의 상징인 일장기와천황치세를 찬미하는 기미가요를 공식 부활시킨 국기국가법과, 헌법개정 논의를 공식화하는 헌법조사회법 등의 제정을 전쟁국가의 전조로 본 것이다.
그런보이지 않는 세력과 흐름의 근저에는 언제나 후쿠자와를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것을 모르고 그때 그때 표피적인대증요법으로만 일관해온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겠는가. 우리 학계에는 아직 제대로 된 후쿠자와 연구서 한 권이 없는 실정이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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