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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드라마 '푸른안개'가 우리에게 묻는다

입력
2001.05.25 00:00

▲2001년 5월,한국인의 두 얼굴PC 통신 대화에서 ‘번섹(통신에서 대화하다 직접 만나 성관계를 갖는 것)’ 이라는 단어가 아무 거리낌 없이 등장하고 최근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한국 주부의 46%가 혼외정사 경험이 있다고 보도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무너진 윤리와 가정을 일으켜 세우자는 집단적인 움직임도 거세게 일고 있다.

또한 ‘시인이 바람을 피면 예술적 행동’ 이고, ‘연예인이 바람을 피면 스캔들’ 이 되며, ‘보통 사람이 바람을 피면 불륜’ 이 되는 다중적인 가치 체계도 있다.

27일 막을 내리는 KBS 주말극 ‘푸른 안개’ 는 엄청난 논란과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40대 유부남과 20대 미혼 여성이 나누는 사랑을 그린 ‘푸른 안개’ 는 평균 시청률 14%(TNS)로 평가할 수 없는 의미를 던져준다.

KBS 인터넷 게시판에는 2만여건의 시청자의 의견이 올라 왔고 가정과 각종 모임에선 ‘푸른 안개’ 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푸른 안개 세대’ 라는 말까지 유행하고 주연들의 극중 대사는 방송 다음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평소 드라마를 외면하는 40~50대 남성들은 주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간다. 심지어 시청자 의견이라는 형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푸른 안개’ 에 대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왜 논란이 되는가?

일부 시청자와 언론에서는 ‘푸른 안개’ 에 대해 불륜 미화와 선정성의 극치라고 비난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진솔한 사랑의 감정을 순수하게 잘 그렸다고 찬사를 보낸다.

양 극단의 반응이다. 처녀와 유부남의 사랑은 수많은 멜로 영화와 드라마의 진부한 소재다. 하지만 왜 유독 ‘푸른 안개’ 가 이처럼 반향을 일으키는 것일까.

주철환 이화여대 교수는 “요즘 사랑과 결혼에 대한 변화한 의미를 곱씹게 해주는 드라마” 라고 지적한다.

이제 전통적 윤리와 규범 논리가 당위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시대다. “사랑이 있다면 유부남이라는 조건과 나이가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푸른 안개’ 에 대한 논란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는 한 여대생의 시청 소감은 가정과 도덕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충격일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랑에서 ‘유부남’ 이라는 단어에 묻어있는 불온함의 상징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푸른 안개’ 는 일반인, 여성, 지식인 사이에서 같은 현상을 두고 전혀 다른 가치 판단을 내리는 이중적인 의식체계의 충돌을 드러냈다.

문화평론가 마정미씨는 “ ‘푸른 안개’ 는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 이라는 자가당착적이며 이기적인 허위 의식을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 냈다” 말했다. ‘푸른 안개’ 의 거센 논란은 규범 논리와 변화하는 현실간 간극의 산물이다.

▲40대 유부남과 20대 미혼 여성

시청 소감 중에 “나의 이야기 같다” 라는 반응이 많다. 그만큼 오늘의 40대 기혼남성과 20대 미혼 여성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말이다.

회사원 김종덕(41)씨는 “우리 같은 나이에 윤성재 같은 생각을 한번이라도 안 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정에 대한 책임과 도덕의식 때문에 못한다. 윤성재 같이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용기가 없을 뿐이다.

결혼은 감정의 무덤이 아니지않는가?”라고 반문한다. 20대 여성의 상당수가 극중 신우처럼 사랑이 있다면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랑은 제도나 도덕에 앞 선다” 는 입장의 여성도 적지 않다.

▲인간은 사랑할 권리가 있다.

“사람이 감정이나 행동에서 자신에게 가장 정직할 때 진정으로 행복하다. ‘푸른 안개’ 는 인간이 행복하고 사랑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작가 이금림씨 말은 2개월 동안 우리 사회에 일었던 40대 유부남과 20대 처녀의 사랑에 대한 논란의 한 결론이 아닐까?

배국남기자

knbae@hk.co.kr

■작가 이금림

“불륜도 사랑이다. 작가는 축복받지 못한 사랑도 다뤄야 한다.”

‘푸른 안개’ 를 관통한 작가 이금림씨의 입장이다. 초반에는 ‘원조교제’와 불륜을 조장하는 드라마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드라마의 전체적인 구성과 내용을 보면 요즘 기혼 남성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하려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시청자와 언론이 몰라 줘 마음이 아팠다. 다만 가족 시청시간대에 편성돼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의도는 27일 방송될 마지막회 극본에서도 잘 나타난다. 가정과 사회적 지위까지 내던진 윤성재와 신우와의 사랑에 결실을 맺게 해달라는 상당수 남성 시청자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신우를 떠나 보내고 윤성재는 조그마한 서점을 운영하며 홀로서기를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이라는 것이 결혼으로 완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두 사람을 결합시키지 않았다.”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보여준 기혼 남성 시청자들의 엄청난 반응에 놀랐다는 이씨는 “최근 ‘칼의 노래’ 의 작가 김훈씨가 동료들과 함께 ‘푸른 안개’ 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는 말을 건네면서 드라마 내용에 대한 세세한 비평을 해줘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

‘은실이’ ‘지평선 너머’ 등 삶의 진정성을 담은 드라마를 주로 써온 이금림씨는 “ ‘푸른 안개’ 는 내게도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었다.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맑고 깨끗한 멜로드라마를 쓰고 싶다” 고 밝혔다.

배국남 기자

■연출자 표민수 PD

‘거짓말’‘바보 같은 사랑’등의 작품에서 표민수PD는 심심찮게 ‘불륜’을 등장시켰다. 그런데도 유독 ‘푸른안개’가 논란이 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주말 가족시간대에 편성되어 주목도가 높았다는 것, 그리고 남녀 주인공의 나이차이가 상식선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표 PD는 ‘20대 여자’와 ‘40대 남자’의 관계 설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두 인생의 조우’를 보여주려 했다.

명문대를 나와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기반을 잡는 순차적인 인생을 살아온 40대, 그리고 집을 나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서기를 하는 20대를 통해 ‘과연 누가 더 철이 든 인생을 살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동성애적 코드를 차용해서 20대의 성공한 남자와 삶에 찌든 40대가장의 인간애를 맑고 섬세하게 그려냈던 ‘슬픈 유혹’처럼, ‘푸른 안개’의 충격적인 설정도 결국 극단적인 인간형의 만남과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푸른 안개’가 통상적인 ‘불륜드라마’와 다르게 평가받는 것은 특유의 섬세한 영상언어 때문이다. 그는 종종 직접적인 클로즈업 대신 거울에 비친 얼굴, 백미러에 반사된 모습으로 심리적 거리를 표현한다.

이번에는 ‘기둥’과 ‘벽’을 주로 이용했다. 신우와 성재, 성재와 경주 사이에 벽과 기둥의 두께를 조절하며 주인공의 심리적 거리감과 감정의 밀도를 표현했다.

심연에 빠진 성재가 등장할 때는 화면에 시커먼 벽이 3분의 2이상 차지하기도 했다. 때로는 탁자 밑에서 앵글을 잡아 마치 주인공이 무거운 탁자에 짓눌린 듯 보이는 기법도 썼다.

‘푸른 안개’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표 PD는 “성재와 신우가 왜 그토록 절실하게 사랑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조교제 논란이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 그의 묵직하고 섬세한 작품스타일은 높은 몰입도를 요구한다.

그래서 주로 심야시간대에 편성되어 마니아들의 열띤 호응을 받았다. 그로서는 유례없이 높은 시청률을 올리며 파란을 불러왔던 주말드라마 ‘푸른 안개’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늘상 화면에 드리우던 딱딱하고 무거운 그늘에서 벗어났습니다. 편하고 일상적인 장면은 아주 쉽게 표현하는 거죠. 완급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양은경기자

key@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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