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생각] 21시간의 파우스트 공연

입력
2001.05.12 00:00

독일에서는 지금 작년 7월에 시작된 대작 '파우스트'의 공연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작품의 제1,2부 전체 1만2,111행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무대에 올린 역사상 최초의 완판본 공연이다.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닷새 저녁을 보거나, 혹은 주말 이틀에 몰아서 내내 본다. 관객이 그저 앉아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공장건물 안에 설치된 여러 개의 무대를 찾아 옮겨 다닌다. (때로는 배우와 어울려, 때로는 연극 속의 등장인물이 되어서 말이다.

연극 속의 식당으로 인도되어 관객 500여명 전원이 차려진 빵과 포도주를 함께 들기도 했다.

그런 장면전환이 제1부와 제2부에 각각 열 번 이상 있다.) 규모에서나 형식에서나 연극에 대한 통념을 깨뜨리는 공연이어서 이런 공연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게만 느껴졌다.

엄청난 분량의 대사를 소화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일 년간 매일 공연을 해내는 배우들의 체력도 놀라왔지만, 관객도 놀라왔다.

초대권도 할인권도 없고 매스컴의 평이 그리 좋지도 않았던 이 공연의 1년치 전 객석이 이미 오래 전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매주 천 여명이 거의 일 년째 관람의 "고역"을 치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공연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일차적으로 페터 슈타인이라는 명연출가의 집념, 약 85명의 연극인들의 혼신의 노력, 850여명의 연극애호가들과 여러 기업들의 재정지원의 결실이다.

관객들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어려있었다. 이제야말로 작품을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관극평도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매주 천 여 명이 스물 한 시간 동안 그것을 보고 생각하고, 또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책을 넘겨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한 편의 문학작품이 사회에 줄 수 있는 긍정적 영향을 이보다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앞으로도 쉽게 없을 것 같다.

'파우스트'는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근본을 알아내겠다는 인간에 대한 드라마이다. 노력하고, 실수하고, 방황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인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물음과 서구 역사의 3천년이, 인조인간까지 등장시키는 분방한 상상력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 기술의 발전이 불러일으키는 문제들, 특히 그것이 수반하는 반인간적 문제들을 시대를 앞질러 성찰하였기에 현재에도 '파우스트'는 그 시사성을 더해 가고 있다. 이 작품을 괴테는 60 여년에 걸쳐 썼으며 제2부는 당대의 이해를 기대하지 않고 봉인하여 남겼다.

제2부는 괴테 사후 스무 해가 넘어서부터 부분적으로 공연되기 시작했으나 170년이 지난 이제 비로소 완판본 공연이 성사되었다.

세상에 이런 긴 호흡의 작품이 존재하며, 이런 기념비적 작품이 바로 이 급박한 시대에 더욱 주목받는다는 것 자체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에 따른 인간의 마모를 절실하게 뒤돌아 보아야할 때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근본에 대한 이야기가 변함없이 유효하다는 것은 안도감을 준다. 추구하고 노력하기에 인간은 방황하며, 방황하는 인간이 바로 바른 길을 향해 가는 중에 있다는 '파우스트'의 메시지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도 얼마나 큰 위로인가.

사람의 마음을 읽고 배려하는 힘을 소홀히 할 수 있는 사회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한 끊임없이 사람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읽고, 생각하고, 이루어 내는 힘이 필요 없는 시대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급하고 어지럽게 돌아가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인식과 성찰에서 우러나온 힘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힘이 없으면 발전된 기술과 넘쳐나는 정보가 무슨 득이 되겠으며, 삶의 지혜로 승화시키지 못 한다면 쌓인 지식이나 재물인들 무슨 뜻이 있겠는가.

전영애 서울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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