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국보 1호로 적합한가”

입력
1996.11.01 00:00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서 가장 큰 논란/문화재위원 사이서도 교체 찬반 엇갈려/문체부 “이달중 여론조사후 최종결정”서울 남대문(원명 숭례문)은 「국보 제1호」에 적합한 문화재인가 아닌가. 문체부의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작업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든 가운데 국보 1호재지정 여부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문화재위원들 사이에서도 국보1호를 우리문화의 대표할만한 다른 문화재로 교체하자는 주장과 그대로 두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논란이 가열되자 문체부는 이달중 국민여론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연초부터 시작된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작업의 가장 큰 취지는 우리 문화유산에 스며있는 일제잔재를 청산, 문화재부문에서도 「역사바로세우기」를 하겠다는 것. 여기에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평가절하하고 말살하려 했다는 비판의식이 깔려 있다.

대표적 예로,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우리나라 최고의 가사인 월인천강지곡의 경우 국어의 발전·보급에 미친 영향에 비춰볼 때 당연히 국보급인데도 보물(제 398호)로 지정돼 있고 「덕수궁」은 일제가 고종을 폐위시킨 뒤 원래의 「경운궁」을 개칭한 것인데도 광복 반세기가 넘도록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대문이 갑자기 재지정 대상으로 떠오른 이유는 이같은 문화재 자체의 「결격사유」때문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국보 「제 1호」라는 상징적인 번호다. 국보 1호를 다른 문화재로 바꿔야 한다는데 찬성하는 문화재위원들은 「제 1호」는 그 자체로 대표성과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국민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문화재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에선 『초등학교의 시험에 「우리나라 국보 1호는?」이라는 식의 문제가 자주 출제되듯, 남대문은 국보1호라는 이유때문에 알게모르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가는 문화재」로 잘못 인식돼 있다』며 이같은 오류를 고치기 위해서도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팔만대장경 훈민정음 등 보다 상징적인 문화재들을 국보1호로 재지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 이에 반대하는 위원들은 국보 1호를 「국보중의 국보」로 이해하는 서열의식부터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문화재에서 1호, 2호, 3호… 등의 번호는 가치의 우열순위가 아니라 지정된 순서이며 문화재라는 것은 모든 분야마다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가치가 나름대로 인정되는 것이기에 우열을 매긴다는 생각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또 국보 1호를 새로 지정할 경우 교과서 백과사전을 개편해야 할 뿐 아니라, 가치에 따라 순번을 바꾸기로 한다면 나중에 그것보다 더 우수한 문화재가 나오면 또다시 서열을 변경해야 하는 등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킨다며 현실적인 이유를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어찌됐든, 문체부는 국민여론조사가 마무리되면 그 결과를 문화재위원회에 회부, 교체여부를 최종 결정할 방침이다. 결국 남대문의 운명은 국민들의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변형섭 기자>

◎교체 찬성입장/임효재 문화재위원·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일제가 임의대로 정한 것 이번기회에 바꾸는게 마땅/‘1호’는 국가대표성과 함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야”

거리마다 노랗게 물든 낙엽이 나뒹굴 때쯤이면 학생들을 가득 태운 지방의 수학 여행버스들을 서울거리에서 마주치게 된다. 남대문 앞을 지나칠 때면 교사는 어김없이 『저것이 우리의 국보 제1호』라며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비한 감도 들지 않아서인지 학생들은 으레 시큰둥한 반응들이라고 한다.

얼마전 오랜만에 찾아온 외국인 학자가 『당신네 나라 국보 1호를 보고싶다』고 하여 그곳으로 안내하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대문은 서울 성곽내로 들어가는 여러개의 문중에 남쪽에 있는 문일텐데 그것이 국보 1호라니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겼던 시기인 1934년 일본인들에 의해 임의대로 관리번호 1호로 정해졌으며, 1962년 정부가 문화재보호법을 새로 만들면서도 일제시대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니 남대문은 시작부터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명칭이 원래의 숭례문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남대문으로 불리는 것 자체부터 잘못된 일이다.

여행자유화가 실현되면서 저마다 해외를 다녀올 기회가 많아졌다. 나 자신도 1년에 몇차례 외국에 나가는 편인데, 몇년전에는 이웃나라 일본의 국보1호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보기 위해 장거리를 달려간 일이 있다. 그 문화재는 우리 눈에도 매우 낯익은 형태의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었는데 천년 고도인 교토(경도)의 광륭사 한 구석에 안치된 채 수많은 외국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이 불상에 대한 느낌은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야스퍼스가 너무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그는 『이 불상에는 진실로,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속박하는 이 지구상의 모든 시간적인 것을 초월했으며 인간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가장 원만한, 그리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표징이었다』며 다소 격정적인 어조로 인류가 낳은 한 위대한 걸작품의 감상기를 쓴 적이 있다.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에서도 문화재에는 가치 서열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일본 역시 이러한 대전제하에 하나의 관리번호로 국보에 번호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국보1호에는 그것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 남다른 비중을 배려하는 지혜를 잊지 않았다. 오늘도 외국관광객의 발길과 감동이 줄을 잇고 있는 그들의 국보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그것을 잘 설명해준다.

광복 반세기를 지나치면서 정부는 일제때 잘못 지정되고 잘못 평가된 문화재를 재평가하는 작업을 벌여왔다. 그중에는 명칭이 잘못되었거나 역사적 가치판단이 잘못된 것이 실제로 한두개가 아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 우리의 옛 성곽을 부수고 거기에 다시 쌓은 왜성들까지도 국가 사적으로 대우받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어차피 우리문화유산에 얼룩진 일본의 잔재를 개끗이 청소하는 마당이라면 겨레의 뜻도 외면한 채 지정된 국보 1호 역시 이번 기회에 새로 지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과정에서 어차피 다소의 혼란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보1호의 교체를 통해 우리가 천년만년동안 간직하게 될 「한국의 얼굴」을 되찾는다면 그런 일시적 혼란쯤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교체 반대입장/장경호 문화재위원·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국보 번호는 조사순서따라 행정편의상 부여한 것/상하위 나누는 서열관념은 오히려 혼란 초래할수도”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이 과연 옳게 지정된 것인가에 대해 오래 전부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의 의견으로는, 그래도 국보 제1호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이며 역사적 가치가 으뜸인 것으로 골라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지금 우리나라의 국가지정문화재는 대부분 일제시대 지정된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일제때 잘못 붙인 명칭 등 고쳐야 할 것도 있기 때문에 이 의견에 수긍이 간다. 그러나 문화재의 지정번호가 마치 그 중요도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알다시피, 국보의 지정번호는 해당 문화재의 가치나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사된 순서에 의해 행정편의상 부여된 일련번호에 불과하다.

어느 것이 높고 어느 것이 낮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결코 아니다. 가치의 우열에 따라 서열을 매긴 것이라면 나중에 보다 뛰어난 문화재가 발견되거나 발굴되면 그때 그때마다 그것을 다시 상위 서열에 올려야 한다는 뜻이 되므로 이같은 발상은 자칫 큰 혼란을 자초할 수도 있다.

문화유산은 과거 우리 조상들이 어떤 시대에 그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만든 역사적 자료이며 보배다. 그러므로 어느 문화재이건 그 나름대로 역사적 가치와 독특성을 갖는, 우리 인간의 개개인과 같이 이 지구상에서는 단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런 문화유산을 골라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모순적인 행동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유네스코에서 우리나라의 불국사, 석굴암과 종묘 그리고 해인사 팔만대장경경판을 461∼463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우리에게 영광을 안겨 주었다. 그렇다고 이들 문화재가 세계에서 461∼463번째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탈리아의 콜로세움이나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아무리 세밀하게 해설된 설명서를 읽어보아도 이것들이 국보 몇호라는 번호를 찾아볼 수가 없다. 또 이처럼 훌륭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이탈리아의 국보 몇호」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행여 어느 건축물이 더 건축적으로 아름답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지를 가리는 게 있다면, 그것은 일련번호가 아니라 보는 이의 안목과 인식수준일 뿐이다.

더욱이 일부에선 『남대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건축물인데도 일제가 우리문화재를 격하시키려고 일부러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라며 본말이 전도된 듯한 주장까지 내세우고 있다. 조선왕조 건국후 태조 5년(1396)에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창건된 뒤 세종 30년(1448) 때 개축된 남대문은 그것에 얽힌 전통과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현존하는 성문중 가장 규모가 큰데다 조선초기의 건축양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적어도 문화재에 관한 한, 제1이나 최상, 그리고 최고의 것을 찾는 우열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문화재가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역사의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다면, 그 어느 돌이 으뜸으로 중요하고 상징적인 것이라고 골라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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