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첫 「30­30」 금자탑 현대 박재홍 선수(한국인터뷰)

입력
1996.09.06 00:00

◎“부정 타격 시비땐 잠 못이뤘어요”/아버지가 주신 인생지침서 노트/심신이 괴로울 때면 읽고 또 읽어/“명분과 실리 고민중 해태서 먼저 트레이드 선언”우리는 밤이면 「작은 영웅」을 만난다. 173㎝ 82㎏의 다부진 체격과 건강한 정신을 지닌 23세 청년. 어디를 봐도 그늘이 없다. 풋풋한 젊음이 더욱 미더운 신세대 우상. 프로야구단 현대 유니콘스의 신인 박재홍. 3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LG와의 경기에서 시즌 30호 홈런을 날려 한국프로야구 15년사상 첫 「30(홈런)―30(도루)」의 대기록을 수립한 영웅이다. 장외에서 만난 그의 인상은 의외로 부드럽고 차분하다. 변화무쌍한 발놀림과 집채크기의 파도처럼 거센 방망이는 어디에도 없다. 낯가림하듯 얌전하면서도 마냥 빼지만은 않는 태도. 쉽게 입을 열지 않으면서도 일단 시작하면 구수한 호남 사투리로 할말을 다하는 당참. 그래서 더욱 정감을 느끼게 한다. 그를 둘러싼 무성한 설들과 인생관 등을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본다.

□대담=남재국 기자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는데 박선수에 대한 팬들의 최대 궁금증은 현대행입니다. 즉 국가대표 중심타자 출신으로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가진 박선수를 연고구단인 해태가 왜 현대와 사상 초유의 1차지명권 트레이드를 단행했을까 하는 것은 아직도 확연히 풀리지않은 수수께끼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밝혀주기 바랍니다.

『당시 저는 프로 진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애틀랜타올림픽 출전에 마음을 확고히 두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에서 현대와 해태가 동시에 스카우트 제의를 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냉담하게 대했지만 양 구단의 끈질긴 접근에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조건은 현대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프로생활을 하려면 고향팀에서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명분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해태가 먼저 트레이드를 선언했죠. 제가 먼저 현대로 가겠다고 고집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당시 공식적으로는 현대가 해태로부터 1차 신인지명권을 양도받고 대신 10승대 선발투수 최상덕을 내주었다)

○고향팬들에 미안한 마음

―현대에서의 초창기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다보니 부모님과 고향(광주)의 친구들 생각에 가슴만 답답했습니다. 그러다 「어차피 여기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 할 몸이니 더이상 주변 상황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이 스쳤고 보란듯이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나니 마음이 안정됐습니다. 광주 첫경기에서 깡통에 맞아 찰과상을 입고 경기후 야유와 욕설을 받을 때는 서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 네가 잘하니까 그런거」라는 형님들의 격려와 야구선수로서의 저를 응원해 주는 또다른 고향팬들의 진정한 성원덕에 첫 고비를 무난히 넘겼습니다. 고향팬들께 미안한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소속을 초월한 훌륭한 선수로 남는 것만이 마음의 빚을 갚는 길로 생각하고 노력할 뿐입니다』

―소속팀의 김용휘 단장과는 각별한 사이인 걸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팀인 현대 피닉스 입단계약을 할 때 처음 뵈었고 이후 트레이드설이 나돌 때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저에게 야구를 비롯한 인생전반에 걸쳐 많은 것을 묻고 경험담을 들려주셨습니다. 단장님과 저는 서로의 솔직한 성격을 좋아하게 됐죠. 운동이란 언제나 잘할 수 만은 없습니다. 저의 「30―30」 달성도 단장님의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주변의 진실된 믿음은 한 개인의 발전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유명인들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헌신이 있습니다. 박선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저의 정신적인 지주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제가 야구선수로서 뿐 아니라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 제가 대학생활(연세대)을 위해 처음으로 고향의 울타리를 벗어날 때 아버지는 50쪽 분량의 노트를 손에 쥐어주셨죠. 거기에는 전문가 수준 못지않은 야구 이야기와 돈 여자 사회생활 등 인생 전반에 걸친 금쪽같은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밤에 잠이 오지 않거나 심신이 풀어질 때면 읽고 또 읽고 합니다. 저의 인생 지침서죠. 광주의 큰 아버지(박기영·67)와 삼풍백화점 사고로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도 저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모교에 승용차 1대 기증

―요즘 돈방석에 앉았는데 그동안 얼마정도 벌었고 어디에 주로 썼나요.

『(웃음) 입단계약금(4억3,000만원)과 연봉(2,000만원)외에 3,500여만원쯤 들어온 것 같습니다. 부수입은 각종 격려금과 메리트 수당 790만원, 선수단내 MVP 상금 300만원, 오일뱅크존 상금 400만원, 언론사의 상금 730여만원, 홈경기 승리수당 400여만원, 20―20기록달성(7월16일 한화전)으로 받은 엑센트 승용차(800만원상당) 등입니다. 이중 계약금은 부모님께 드렸고 승용차는 지난달 모교인 광주일고에 기증했습니다. 월급과 나머지는 한달 용돈 50만원정도를 제하고는 일단 저축합니다. 30―30기록달성으로 받게될 티뷰론 승용차는 아직 용도를 결정하지 못했습니다』(아직 박선수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상대 투수들의 집중 견제로 6월14일부터 21일까지 18타수 무안타의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고 부정타격 시비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월 용돈 50만원정도

『무안타 행진을 할 때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당시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저는 고집이 센데다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스스로 분에 못이겨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그러다 마음만 너무 앞선 저 자신을 발견하고는 평소대로 취침전 충분히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휴식으로 정상 컨디션을 되찾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부정타격 시비때도 처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호흡을 가다듬고 공을 기다리고 있는데 상대팀 감독님들이 타임을 요청하는 일이 되풀이 되다보니 밸런스가 깨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겪어야 할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제는 심리전에 휩싸이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어요』

야간경기를 마친후 숙소인 롯데월드호텔에서 밤늦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은 벌써 다음날 새벽 1시. 웬만하면 다음 경기를 위해 잠자리에 들만도 하련만 박재홍은 기자를 전송한 후 방망이를 들고는 호텔옆 공터로 향했다.

□약력

▲생년월일:1973년 9월7일

▲체격:173㎝ 82㎏ 우투우타

▲학력:86년 광주 서림초등학교(86년)―광주 무등중(89년)―광주일고(92년)―연세대(96년) 졸업

▲주요경력:92∼95년 국가대표

▲주요성적:91년 전국고교대회 준우승 3회(3개대회서 타격 타점 감투 3관왕), 93년 국제야구연맹 세계올스타전 참가, 95년 대학춘계리그 3관왕(MVP 도루 타점)

▲프로입단:96년. 계약금 4억 3,000만원, 연봉 2,000만원(역대타자 최고액)

▲존경하는 선수:선동렬

▲가족관계:박윤영(60) 조영지씨(52)의 3남1녀중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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