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친고죄 폐지 어떤가/93년 특별법 제정 최근 다시 논란

입력
1996.07.18 00:00

◎서구엔 개념없고 일서 일부 적용/당정,「범위」 축소 개정 추진… 비밀법정제 등 보완조치 제기도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 폐지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분분하다. 성폭행 피해 여중생의 수업중 출산을 계기로 일기 시작한 성폭력에 관한 우려가 성폭력특별법상의 친고죄 폐지론으로 발전한 것이다. 여성계에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 전화 등을 중심으로 친고죄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고, 정부와 집권여당도 친고죄와 관련된 성폭력특별법 일부조항 개정을 논의중이다. 그러나 법조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 일각에는 여전히 친고죄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경위◁

성범죄가 크게 늘어 성폭력특별법 제정이 논의되던 93년부터 친고죄 존폐는 문제가 됐다. 공청회 개최등으로 각계의 여론을 수렴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94년 4월부터 시행되고 있으나 이 법은 특수강도강간 특수강간, 피해자가 친족이거나 장애인인 경우를 제외한 성폭력 범죄는 반드시 당사자의 신고가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피해자가 13세 미만인 경우는 친권자만이 신고할 수 있으며 사건 발생 1년이 경과하면 당사자라도 고소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여성계에서는 순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피해여성이 수치심과 신분노출 등을 우려해 신고를 꺼림으로써 성폭력을 감추거나 조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친고죄의 전면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성폭력특별법제정추진특별위원회가 93년 공청회 당시 5대도시 성인남녀 5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65.4%가 『성폭행을 당했을 경우 여성단체나 상담기관에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응답했다. 이유는 「믿을 수 있다」(79.9%)와 「비밀보장(17.3%)」이었다. 반면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는 응답은 30.6%에 불과했다.

최근 발생한 소녀가장 성폭행 사건에서 보듯이 미성년자나 고아, 시설 보호아동의 경우는 주변에서 성폭행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처벌조항이 없다는 현실이 입증됐다.

반면 친고죄의 존속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피해자의 의사존중과 명예보호 등을 내세워 폐지를 반대하고 있다.

성범죄의 경우 의사가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데 친고죄가 폐지될 경우 피해자가 원하지 않더라도 주위에 의해 고소가 이루어짐으로써 명예훼손 등의 불이익을 당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후약방문격인 공권력의 무조건적 개입에 매달리기 보다는 사회 전체의 도덕성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않다.

▷외국사례◁

이런 두 견해는 성폭력을 사회적 범죄로 규정하느냐, 개인적 문제로 보느냐 하는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다. 외국서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성폭력사범 처벌은 특별법이 아닌 일반 형법에 따른다. 성범죄를 일반 범죄와 마찬가지로 발견 즉시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성관념이 우리와 다른 미국과 독일 프랑스 등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친고죄의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피해자의 명예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비밀법정 등의 제도를 실시한다. 반면 우리와 성관념이 비슷한 일본의 경우는 강간에 한해서만 친고죄를 적용하고 있다.

▷전망◁

정부와 신한국당이 성폭력특별법 개정을 추진키로 의견이 접근되고 있어 친고죄 부분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계에서는 친고죄의 전면 폐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성년자 성폭행을 친고죄에서 제외시키는 등 범위를 축소하는 절충안이 유력한 것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행 친고죄 조항을 개정하게 될 경우 이를 뒷받침할만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특별법 제정에 참여했던 이종걸 변호사는 『보완조치 없는 친고죄의 전면폐지나 단순한 범위축소는 문제의 소지가 많다』며 『현행법을 개정하게 될 경우 비밀법정제 도입, 상담소 등 제3의 기관에 의한 상담자료의 증거 채택 등 피해자 보호절차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시설수용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보호자에게 신고의무를 지우는 방법도 검토해볼 만하다』고 말했다.<김지영 기자>

◎반대 입장/김일수 고려대 법대 학장/“이중피해 없게 존속 필요”/성숙한 인격체 자기결정권 침해 우려

성도덕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해마지 않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타락의 독한 열매를 보게 된다. 11세 소녀가장에 대한 이웃들의 줄이은 성폭행, 성폭행 피해 여중생의 수업중 출산, 주인집 노인의 자취 여중생 성폭행과 피해 여중생의 낙태…. 충격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신문 사회면은 여름날을 차라리 슬픈 빛으로 채색한다.

사건의 파장속에서 여성단체들은 형법상 강간과 강제추행,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 등을 비친고죄로 변경하자고 나섰다. 피해자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친고죄로 규정했는데도 이것이 오히려 범죄를 은폐시키거나 조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이유때문이다. 이 주장에 정부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신속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조치는 성범죄 대응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민앞에 반복적으로 보여준 상투적인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특정 강력범죄처벌에 관한 특례법,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강력한 입법조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직폭력특별단속, 학교폭력근절, 범죄와의 전쟁 등 강력한 범죄투쟁들은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약 5만명에 불과한 전국 교도소와 구치소 수용인원이 최근에는 6만5천여명으로 늘어나 그 과밀이 심각하다고 한다.

특히 성폭력특별법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성폭력범죄를 비친고죄화하고 그 처벌의 강도를 높여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범은 수그러들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형법에 남겨 둔 강간, 강제추행, 미성년자 간음 등 친고죄 규정마저 폐지하는 것이 성폭력범죄대책에 효과적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친고죄 규정은 국가소추주의의 예외를 인정해 소추권을 피해자의 고소여하에 의존시킴으로써 일종의 개인소추주의의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이같은 소추조건은 범죄의 성립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처벌을 위한 국가소추권 행사를 제한할 뿐이다. 성범죄의 성격상 피해자의 명예와 감정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범죄투쟁보다 중시해야 할 면이 있고 피해자의 의사, 판단, 결정을 국가의 수사, 소추권 행사보다 우선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강간, 강제추행에서 중시하는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권이고 미성년자 간음죄의 보호법익은 13세미만 연소자의 장애없는 성적 인격의 성숙이다. 강간, 강제추행죄의 처벌에서 중요한 요건은 피해자의 의사인 반면 미성년자 간음죄에서는 피해자의 의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13세미만 미성년자 간음죄를 비친고죄로 하는 것은 이론상 무리가 없지만 그 밖의 강간죄 등을 비친고죄로 한다면 자율시민사회에서 성숙한 범죄피해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처분의 몫을 국가가 범죄투쟁이란 명목으로 빼앗는 것과 같게 된다.

성폭력범죄에 대한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사법적 대응책을 계몽하는 것은 좋으나 친고죄규정을 폐지하는 것은 피해자가 입게 될 정신적 충격과 명예손상 등의 불이익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까 두렵다. 피해자를 범죄투쟁의 수단으로 다루면 자유로운 인격주체성이 침해된다. 개정 형법이 범죄피해자의 진술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한 점도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찬성 입장/신혜수 한국여성의전화 회장/“반인간범죄 근절 지름길”/명예보호 명분 오히려 가해자에 악용

최근 잇따라 발생한 성폭력 사건으로 온 나라가 술렁이고 있다. 나이 어린 소녀가장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보호자가 없다는 약점을 이용해 한마을 주민 14명이 줄줄이 강간한 사건, 자신이 지도하고 보호해야 할 유치원 원아들을 성추행한 사건 등 도저히 인간행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파렴치한 일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일생에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준다. 이를 견디다 못한 피해자가 자살이나 살인에까지 이르게 하는 중대 범죄다. 정부에서도 최근 잇따르고 있는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성폭력을 근절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의 발견이 그 첫걸음이다. 그러나 몇몇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폭력 범죄가 친고죄로 되어있는 현행 성폭력특별법을 가지고는 정확한 사건의 발생건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친고죄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의견은 피해자의 명예보호와 선택권 등 피해자의 권익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 근거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성폭력을 사회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보는데서 비롯된다. 이는 성폭력이 한 인간의 인격을 침해하는 범죄행위가 아니라 성적인 문제라는 사회적 통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폭력을 친고죄로 규정한 현행 법규정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주변에서 성폭력 사건을 알고도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교 선생님이 제자의 피해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부모가 이를 고소하지 않으면 그대로 덮어둘 수 밖에 없다. 가해자가 한 동네에서 여러명의 아이들을 성폭행한 경우에도 친부모가 나서서 고소하지 않는 한 수사나 어떤 법적 제재도 불가능하다. 특히 미성년 소년소녀가장 등 부모가 없는 경우나 시설에 수용돼있는 아동의 경우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최근 발생한 소녀가장 성폭행 사건의 경우도 주변에서 피해사실을 인지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만일 친고죄 조항이 없었더라면 이 어린 소녀가 보다 빨리 보호받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피해자의 권익보호 문제다. 친고죄의 본래 의도는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이는 오히려 피해사실을 은폐하려는 가해자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많다. 그리고 이는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자들의 가중된 폭력 혹은 상습적인 폭력을 조장할 가능성을 상당히 높인다. 친고죄 폐지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자 신분노출 등 명예와 권익보호는 특별법 제정 이후에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관계자들의 가해자 중심적인 태도를 피해자 중심적인 태도로 바꾸는 일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다.

셋째, 친고죄 조항은 사회적 범죄인 성폭력 범죄를 개인적인 성적 문제로 뒤바꿔버린다. 그 직접적인 결과 성폭력 범죄는 처벌해 마땅한 범죄가 아닌, 개인적인 불행으로 받아들여져 신고율의 저하를 초래한다. 자연히 성범죄의 억제효과도 반감될 수 밖에 없다.

성폭력은 한 인간의 인간성을 황폐화시키고 인격을 파괴하는 명백한 범죄행위다. 따라서 피해자의 명예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을 잠정적인 성폭력 피해대상으로 만드는 친고죄 조항은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