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머리, 등에 올라탄 거머리들

2024.07.22 04:30

닐 골드슈미트는 1970년대 쇠락한 임업도시 오리건주 포틀랜드를 오늘날 미국 북서부 하이테크 산업의 거점이자 뉴어버니즘(new urbanism)의 모범 도시로 변모시킨 시장 출신 스타 정치인이다. 그는 연방 장관과 글로벌 기업 CEO, 오리건주 주지사를 역임했고, 공직 퇴임 후에도 법률-경영 컨설턴트 겸 막후 정치 조력자로서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시민들의 존경과 찬사를 누렸다.2004년 그가 시장 시절 만 13세 소녀를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 그 여성을 10여년간 성적으로 학대한 사실이 드러났다. 시청 부하직원의 딸이던 피해 여성은 자살 시도 끝에 학교를 중퇴하고 술과 마약에 의존하며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2011년 외롭게 숨졌다. 하지만 골드슈미트의 범죄를 묵인-은폐하며 부와 권력을 나눠 누렸던 오리건주와 포틀랜드시 유력자 다수는, 진실이 폭로된 뒤에도 그를 동정하며 ‘영웅’의 추락을 안타까워했다.야누스의 정치인 닐 골드슈미트(Neil Goldschmidt, 1940.6.16~ 2024.6.12)가 별세했다. 향년 83세. 포틀랜드는 미국 시민이 꼽는 ‘가장 살기 좋은 도시’ 혹은 ‘가장 보행자 친화적인 도시’ 리스트에 단골로 오르는 도시다. 도심 비즈니스 지구와 변두리 슬럼- 교외 중산층 주거지역으로 나뉘는 대도시의 보편적인 평면 구획과 달리 포틀랜드는 직장과 집, 상가와 공원을 품은 작은 공동체들이 보행거리 안에 병존하며 5개 노선의 경전철(Max Light Rail)이 도심 주요 시설, 북동부 국제공항을 잇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때 세계 대도시 힙스터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잡지 ‘킨포크(Kinfork)’가 탄생한 곳도, 그 잡지가 지향하는 ‘슬로 라이프-킨포크 문화’가 탄생한 곳도 포틀랜드다. 오리건대 로스쿨을 졸업한 닐 골드슈미트는 미국 60년대를 대표할 만한 백인 진보 청년이었다. 그는 민권단체들이 목숨 걸고 감행한 남부 흑인 유권자 등록 캠페인 ‘미시시피 자유의 여름’ 행사에 참가했고, 졸업 후 사회적 약자를 돕는 비영리 법률단체((The Legal Aid Society)에서 활동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가 50년대 역점사업으로 전개한 전국 고속도로망 구축 프로젝트 즉 수도와 본토 48개 주 주요 도시를 주간고속도로로 잇겠다는 구상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을 이끌다 70년 만 29세 최연소로 포틀랜드 행정관에 선출됐고, 72년 말 미국 주요 도시 최연소 시장에 당선됐다. 시장 골드슈미트는 주-연방 정부와 협상을 벌여 서민 빈민 주택 수천 채를 철거한 자리에 가로놓일 주간고속도로 계획을 백지화하고 그 예산으로 도심 순환 경전철과 대규모 환승 쇼핑몰을 건설했다.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던 기존 고속도로의 윌라메트 강변구간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수변공원을 조성했고, 도심 대형 지상 주차장을 시민광장으로 꾸몄다. 한마디로 그는 미국 도시계획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의 61년 저서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탐독한 뉴어버니즘의 제1사도이자 미국 도시재생의 선구자였다. 제이콥스는 저 책에서 고속도로와 자동차를 앞세운 불도저식 도시계획이 지역 공동체 문화와 도시의 개성을 파괴하고 주거 격차 등을 심화한다고 비판했다. 포틀랜드 시의회가 2003년 정한 도시의 공식 닉네임은 ‘장미의 도시(City of Roses)’지만,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포틀랜드는 ‘스텀프타운(stump town)’, 즉 그루터기 마을이라 불렸다. 도시는 캐스케이드산맥의 방대한 임업 자원, 특히 폰데로사 소나무의 생산-가공 거점 도시였다. 19~20세기 캘리포니아 건설 수요를 대느라 베어낸 나무 그루터기를 파낼 겨를조차 없었다는 임업 경기는, 하지만 전후 50,60년대를 거치며 값싼 수입목재와 환경-생태운동의 기세에 밀려 빠르게 쇠퇴했다. 제재소들이 문을 닫고 노동자들이 떠나갔다. 골드슈미트가 취임하던 무렵 스텀프타운은 북동부 ‘러스트벨트’처럼 을씨년스러워지고 있었다. 젊은 시장은 풍부한 유휴 노동력과 쾌적한 업무- 생활 환경, 파격적인 규제 완화 및 세제 혜택 등을 앞세워 저공해- 하이테크 기업 본사와 공장들을 대거 유치했고, 그의 열정적인 행보에 시민도 시의회도 환호했다. 그는 재선 임기 중 카터 행정부의 교통부장관(79~81)에 발탁됐다. 이임식이 끝난 뒤 시청 공무원들은 그의 발치에 데이지꽃을 뿌려주며 그의 앞날을 축복했다. 그는 장관 퇴임 후 포틀랜드에 본사를 둔 나이키사 캐나다 지사장을 거쳐 87년 ‘오리건의 부활(The Oregon Comeback)’ 깃발을 들고 주지사로 금의환향했다. 여성과 소수인종을 주정부 요직에 대거 등용했고, 산업구조를 IT산업 위주로 재편했고, 경찰과 교도소 행정을 개혁했다. 시민 복지, 특히 미취학 아동-청소년 복지와 기회 평등을 강조하며 아동 학대를 근절하기 위한 ‘아동 어젠다(Children Agenda)’를 역점 사업으로 전개했고, 91년 ‘오리건어린이재단’을 설립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유청소년 문해력 증진 프로그램 ‘SMART(Start Making A Reader Today)’를 전개했다. 한마디로 그는 ‘포틀랜드(오리건)의 아들’이 아니라 ‘포틀랜드의 구세주’였다. 2004년 그의 범죄 전모를 특종 보도한 대안 주간지 윌라메트 위크(Willamette Week)는 창간 25주년이던 2000년 특별기사로 "지난 25년 포틀랜드 역사의 최대 사건으로 골드슈미트의 고속도로 건설계획 백지화를 꼽으며 "포틀랜드는 이후로도 그보다 나은 시장을 만나지 못했다"고 썼다. 그가 워싱턴D.C로 떠나던 무렵, 18세가 된 엘리자베스 린 더넘(Elizabeth Lynn Dunham, 1961.5.12~2011.1.16)은 술과 마약의 늪에서 어렵사리 벗어나 독학으로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장 선거 참모 출신 비서였던 어머니의 생일 파티가 열렸던 5년 전 어느 날, 만 13세의 더넘은 자기집 지하실에서, 파티 참석자들이 “신처럼 떠받들던” 골드슈미트에게 처음 강간 당했다. 더넘은 이후에도 수시로, 하교길 학교 인근에서 기다리던 시장 운전기사의 차에 태워져 집과 호텔, 시장 지인의 빈 아파트 등지로 끌려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학급에서 가장 똑똑하고(…) 상대를 휘어잡는 매력을 지녔던” 소녀는 15세 때 자살을 시도했고, 고교를 중퇴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오리건대에 진학했지만 오래 다니지 못했다.더넘은 친구들에게 골드슈미트를 ‘구원자(savior)’ 혹은 ‘멘토’로 말한 적도 있었고, “목숨을 뺀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약탈자로 묘사한 적도 있었다. 자신을 향한 실력자의 ‘각별한 관심’을 과시하며 심리적 의존 상태에 빠져들 때도 있었고, 수치심과 죄의식, 분노를 표출할 때도 있었다. 한때 연인이던 한 지인은 그가 “격렬하고 모순적인 감정(roller-coaster gal)”에 휩싸이곤 했다고 말했다.82년 만 21세의 그는 애증의 도시를 벗어나 새 출발을 다짐하듯 뉴욕으로 이주, 아메리칸드라마예술아카데미에 등록해 연기와 노래를 공부했지만 그 역시 이내 포기했다. 미 국립범죄피해자센터 청소년국장 미트루 시얼란테(Mitru Ciarlante)에 따르면 “삶의 목표에 끈기를 갖고 집중하지 못하는 건 10대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전형적 증상 중 하나”다. 더넘은 마약과 음주운전 등으로 여러 차례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그럴 때마다 골드슈미트는 더넘 담당 해결사 노릇을 하던 사업가 지인(Robert Burtchaell)을 보내 은밀히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다.88년 더넘에게 시애틀의 한 로펌에 일자리를 마련해준 것도 골드슈미트였다. 그해 말 더넘은 병원에 다녀오던 길에 괴한에게 납치돼 무자비한 폭행과 강간을 당했다. 재판 과정에서 더넘의 진술이 오락가락하면서 10대 시절 성폭행 피해 사실이 드러났다. 그의 과거 정신과 상담기록 증거 채택 여부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시기와 정황 등을 따져보면 과거의 가해자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는, 골드슈미트에겐 시한폭탄 같은 문건이었다. 골드슈미트가 주지사(87~91)로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90년 2월, 만 49세의 그는 “더는 가족과의 사랑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돌연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선이 거의 확실시됐고 일부는 연방의회 진출을 점치던 무렵이었다. 한 지역 언론이 “유력 정치인의 자발적인 정치적 실종”이라 썼을 만큼 충격적이었던 그 발표 직후 그는 아내와 이혼했지만(1991) 은퇴-이혼의 진짜 이유를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항소법원은 92년 9월 더넘의 상담기록 증거 채택을 최종 불허했다. 골드슈미트는 91년 법률-경영 컨설팅 회사를 설립, 기업 M&A와 대규모 관급 건설-토목 컨설팅, 후임 주지사 선거-정치 고문 등으로 활약했고, 자신이 M&A를 성사시킨 한 기업 임원(Diana Snowden)과 94년 재혼했다. 더넘은 성폭행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으로 월 400달러 장애연금을 받게 됐지만 그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졌다. 91~94년 사이 9차례 음주-마약 위반 혐의로 체포돼 5개월 간 옥살이까지 했다. 오리건주 상원의원이던 밥 팩우드(Bob Packwood)가 92년 상습 성추행 사실이 들통나 95년 의원직을 사임한 일이 있었다. 더넘은 94년 변호사를 고용해 골드슈미트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0대 성폭력 피해자가 20,30년이 지난 뒤에야 법적 구제에 나서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골드슈미트 측은 피소 3개월 만에 소송비용 일체를 포함 약 35만 달러 배상금 분할 지급에 합의하며 ‘소송 관련 사항에 대한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걸었다. 더넘은 네바다의 한 남성(Steven Cummings)과 96년 결혼했다가 2006년 이혼했고, 포틀랜드로 되돌아온 뒤 한 요양시설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약물과 알코올 중독 증상과 싸웠다. ‘윌라메트 위크(이하 WW)' 기자 나이젤 저퀴스(Nigel Jaquiss)가 더넘의 체포-재판 기록을 추적하고 주변인들을 인터뷰해 2004년 5월 골드슈미트의 미성년자 성폭력 사건 전모를 확인, 보도 직전 골드슈미트 측에 기사 요약본을 전달하고 항변 기회를 주었다. 골드슈미트의 변호사는 기자를 만나 골드슈미트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스스로 공개하고 일체의 활동을 중단할테니 보도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WW는 ’30년 간의 비밀(The 30-years Secret)’이란 제목의 장문의 기사를 2004년 5월 11일자에 보도했다. 같은 날 오리건주 최대 일간지 ‘The Oregonian’도 골드슈미트의 고백을 기사화했다. 하지만 일간지 1면 머릿기사와 제목은 그가 저지른 짓이 주법상 3급강간(5년 징역형)에 해당되는 미성년자 성폭력이 아니라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지속한 “한때의 불륜(an affair)”으로, 대상도 13세 소녀가 아니라 ‘10대’로 묘사했다. 사설에서는 “위대한 정치인을 잃은 비극”을 안타까워했다.골드슈미트의 한 오랜 동료(Garry Frank)는 인터뷰에서 “그가 저지른 일을 묵과할 순 없지만 그가 오리건주가 배출한 가장 똑똑하고 카리스마 있는, 선구적인 정치인이란 사실은 엄연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동료(Mitzi Scott)는 “문제의 핵심은 그가 이 도시와 시민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점이다.(…) 그가 실수했다고 해서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골드슈미트의 해결사 노릇을 해주며 사업 특혜를 받은 의혹이 있던 인사(Robert Burtchaell)는 독자란에 “골드슈미트의 비밀을 알아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제목의 글을 투고했다. “이 건의 본질은 성인 남성이 어린 소녀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게 아니라(…) 오랜 고통과 참회의 세월 끝에 마침내 스스로를 구원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독자들의 거센 항의 끝에 신문은 며칠 뒤 첫 보도와 사설에 대해, (피해자가 아니라) 독자들에게 사과했다.더넘을 인터뷰한 ‘The Oregonian’의 한 여성 칼럼니스트는 더넘이 당시 기사에 대해 무척 화가 나 있었다고 썼다. “기사들은 그녀를 내다버려도 좋을 사람, 말썽쟁이 10대, 오리건주에서 가장 강력하고 카리스카 넘치는 남자에게 어린시절 학대를 당하지 않았어도 망가진 삶을 살았을 전과자처럼 보이게 했다.” 시민 중에도 거기 동조하거나 더넘의 상처를 안줏거리 삼은 이들이 있었다. 2003년 말 골드슈미트의 과거를 알게 된 뒤 언론사에 제보한 적이 있는, 그의 연설문 담당 전 비서관 프레드 레온하르트(Fred Leonhardt)는 2011년 칼럼에 “나는 ‘14세 소녀들이 어떤지 잘 안다. 그녀는 가련하고 멍청한 닐을 함정에 빠뜨린 성적 약탈자다’라며 더넘을 비난하는 한 변호사의 말을 들은 적이 있고,(…) 그녀를 ‘나이만 어린 모니카 르윈스키’라고 하는 동료의 말도 들은 적이 있다”고 썼다. 레온하르트가 반박하자 그 동료는 “당신은 사물을 흑백으로 보지만 나는 회색의 그림자를 본다”며 오히려 그를 비난했다고 한다. 그해 헬로윈 파티에 골드슈미트와 더넘으로 분장하고 나타난 지역 변호사 부부도 있었다.오리건주의 미성년자 의제강간 공소시효(만 3년) 덕에 골드슈미트는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긴 세월 그의 범죄 행각을 묵인한 주 보안관(Bernie Giusto)만 2008년 임기 중 사임했다. 골드슈미트는 말년까지 프랑스 프로방스의 전원지역 별장을 오가며 지냈고, 지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정치무대 복귀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내도록 익명이던 더넘은 숨진 뒤에야 사진과 함께 세상에 등장했다. 2004년 보도로 그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WW의 저퀴스는 2011년 1월 부고 기사에 “골드슈미트가 훔친 목록에 그녀의 신원까지 포함돼서는 안 된다는 판단으로, 피해자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된 지금이야말로 학대의 진실을 더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그의 실명을 공개한다고 썼다.레온하르트는 지역 매체 ‘The Register-Guard’에 ‘악을 외면하다(See No Evil)’란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기업 인수, 콘도미니엄 개발, 경전철 노선 확장으로 번 돈, 높은 자리에서 모든 특혜를 누려온 기업 임원들과 고위 정치인들, 그들은 알링턴클럽 회원권을 얻기 위해,(…) 위대한 권력자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영광을 위해,(…)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침묵의 음모는 없었다. 사람들은 이야기했고, 또 알고 있었다. 대신 훨씬 더 나쁜 냉담의 음모가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긴 세월 동안 닐에게 맞선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더넘 뿐이었다며, 94년 민사소송 당시 더넘이 제시한 합의 조건이야말로 그가 오리건주에 베푼 값진 선물이었다고 썼다. 그건 골드슈미트의 공직 재출마 금지였다.

신동빈 롯데 회장, 주한 베트남 대사관 가서 베트남 서기장 기렸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종로구 주한 베트남 대사관을 찾아 19일 별세한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을 조문했다. 롯데그룹에 따르면 신 회장은 이날 오전 9시쯤 이동우 롯데지주 대표이사, 이갑 롯데지주 커뮤니케이션실장과 함께 주한 베트남 대사관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등 그룹 유통 계열사의 베트남 법인장들도 쫑 서기장의 시신이 안치된 국립장례식장에서 조문했다. 신 회장은 최근 2년 새 베트남을 세 차례 찾을 만큼 현지 사업에 공을 들이며 각별한 애정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롯데그룹은 롯데GRS가 롯데리아 브랜드로 베트남에 처음 진출한 뒤 백화점, 대형마트 호텔, 시네마, 테마파크 등 19개 계열사가 현지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롯데벤처스 베트남의 경우 외국계 벤처투자 법인 중 최초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기업등록발급 승인을 받아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관련 펀드 운용을 앞두고 있다. 베트남 현지 사업장들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 반기를 게양하고 홈페이지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내 롯데 로고를 모두 흑백으로 바꿨다. 25, 26일 이틀 동안 치러지는 장례 기간에는 판촉 행사와 음악 방송 등을 중단하고 영화 상영관과 키자니아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장 문도 닫는다.

"언론은 흉기"라던 이진숙의 '공영방송 대수술' 시작되나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24~26일 사흘간 열렸다. 후보자 지명 직후 "언론은 흉기"라며 MBC 등 공영방송 대수술을 예고한 그는 청문회에서 거침없는 모습을 보였다. MBC 재직 시절 노조 탄압과 여론조작 시도, 법인카드 사적 유용 등으로 난타를 당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폄훼 글에 동조한 것을 비롯해 역사관과 정치 중립성이 비판을 받은 데 대해 "못 할 말을 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르면 다음 주 그의 임명을 강행해 '대수술 집도'를 맡길 것이란 전망이 많다.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한여름처럼 뜨거운...최진영의 ‘쓰게 될 것’

자신을 때리고 굶기는 부모가 아닌 ‘진짜 부모’를 찾아 떠도는 소녀(‘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와 죽은 연인의 시체를 먹는 여성(‘구의 증명’),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제야 언니에게’) 등 외면하고만 싶은 폭력과 고통의 세계를 치열하게 그려온 소설가 최진영(43). 그의 작품은 분명 어두움에도 고요하고 서늘하기보다는 한여름처럼 뜨겁다. 최근 세상에 나온 최 작가의 소설집 ‘쓰게 될 것’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거야”라고 말하는 소설 속 인물에게서 열기가 느껴진다. 이들의 남다른 온도는 한국일보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는 작가 본인에게서 비롯됐음이 분명하다. “저는 제가 상상해서 만든 이야기와 인물 뒤에 숨어서 저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때 내가 좀 아팠어. 외로웠어. 서운했어. 사실은 내가 널 사랑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최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렇기에 자신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전쟁과 기후위기, 인공지능(AI), 질병 등 그를 둘러싼 환경이 가혹해질수록 더욱 그렇다. ‘쓰게 될 것’의 표제작 주인공 ‘유나’가 대표적이다. 가족을 잃고도 계속되는 전쟁과 함께 자라난 유나는 “누군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을. 내가 죽어야만 누군가가 살 수 있는 상황을” 자주 상상하면서도 “매일 밤 삶을 선택한다.” 최 작가는 “‘쓰게 될 것’의 소설들은 소설 쓰기의 즐거움을 뒤늦게 깨달아가던 시기에 쓴 소설들”이라고 밝혔다.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해 “18년 가까이 글을 쓰고 있지만 ‘글쓰기의 즐거움과 자유로움’에 대해서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그에게 ‘글을 왜 쓰나’라고 물어보면 '할 수 있는 말'과 '하고 싶은 말'이 이번 소설집에 담겼다. 특히 작가의 시선이 “근미래가 아닌 현재고, 지금 일어나는 일”에 닿은 건 “소설가, 또는 작가의 일이란 다만 쓰는 일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 깊이 생각하는 일”이라는 신념 때문이다. 최 작가는 덧붙였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소설을) 시작하는 것 같아요.” 최 작가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이다. 최근 역주행 베스트셀러에 오른 장편소설 ‘구의 증명’(2015)의 인기 역시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최 작가는 반문했다. 실현은커녕 상상조차 어려운 처절한 사랑 이야기에 ‘진실한 사랑’을 믿지 않는 것 같은 현대인이 감응했다. 그는 “대부분의 소설은 사랑 이야기”라며 “사랑은 때로 나를 너무 힘들게 하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2010년 첫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낸 이후 거의 매년 작품을 발표하는 최 작가다. 그는 “글쓰기는 너무나도 필요한 일”이라면서 “이야기로 쓰면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것의 진짜 감정을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울, 자기혐오, 비관, 증오, 외로움, 체념, 분노 등이 나를 잠식해 버릴 것”이라고 털어놨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위협하는 감정과 상황, 부정하거나 버리고 싶은 부분 또한 ‘나’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최 작가는 앞으로도 계속 쓰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계속 쓰겠다’는 말은 곧 ‘계속 나로 살아가겠다’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