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국선변호사에 나홀로 재판... "다시 돌아가면 빚내서라도 사선 쓸 것"

입력
2024.02.28 04:30
10면
구독

[범죄피해자: ?변호사가 방치한 피해자]
불법촬영 고소로 피해자 국선변호사 선임
연락두절, 무신경... "제가 유별난 걸까요"
낮은 처우, 非전담 94%... 양질 변호 불가
법무부 "국선 전담 처우 개선 노력할 것"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릴 때도, 지금도 혼자 싸워야 했습니다. 한국은 피해자를 제대로 지켜주는지 모르겠습니다."

12일 취재진에게 제보 이메일이 왔다. 불법촬영 피해를 겪은 윤지혜(가명·30)씨였다. 지혜씨는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해 7년간 홀로 감내한 싸움의 과정과 좌절을 풀어냈다. "다른 피해자들이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불합리한 피해자 조력 제도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공개했다.

세 번 바뀐 변호인, '도우미'론 역부족

악몽은 2017년 봄에 시작됐다. 사귀던 남성이 지혜씨를 불법촬영한 것이다. 한 달 뒤에야 피해사실을 알았지만 신고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열세 살 때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고도 범인을 잡지 못한 무력감이 트라우마로 남았던 탓이다. 5년이 지난 2022년 지혜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다 진짜 죽을 것 같아서 '살려고' 신고했어요."

몇 번을 망설이다 낸 용기는 법정에서 무참히 꺾였다. 형사소송법은 피해자는 재판 당사자가 아니라 했지만, 가해자 재판에서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경찰 신고 직후 선임된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바쁘다"는 핑계만 대며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스스로 책이나 인터넷을 검색해 권리를 행사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결국 1심에선 혼자 힘으로 증언대에 섰다. 그간 변호사 사임계에만 두 번 서명했다. 첫 변호사는 "피해자 의견서 한 부를 보내겠다"고 하고선 연락이 끊겼고, 두 번째 변호사는 재판 기록 열람 및 등사를 요청한 지혜씨에게 "피해자는 재판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동의서 못 내 감형, 판결문으로 또 상처

지혜씨가 2심 재판부에 제출한 피해자 엄벌탄원서 내용. 지혜씨 제공

지혜씨가 2심 재판부에 제출한 피해자 엄벌탄원서 내용. 지혜씨 제공

그렇게 '깜깜이' 재판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불안감은 적중했다. 징역 6개월의 실형을 내린 1심 판결이 항소심에서 벌금 300만 원으로 대폭 감형된 것. 누가 봐도 이례적이었다. 배경엔 가해자가 낸 공탁금 1,000만 원이 있었다. 재판부가1,000만 원을 "피해자를 위한 손해배상금"으로 인정한 것이다.

지혜씨의 '거부' 의견은 반영조차 되지 않았다. 항소심 선고 3주 전, 공탁 사실을 알게 된 지혜씨는 곧장 세 번째 변호사에게 "공탁금 거부 의견서를 내 달라"고 요청했다. 공탁금을 원치 않는 피해자는 공탁소(법원에서 공탁 업무를 처리하는 부서)에 '회수 동의서'를 제출할 수 있다. 당사자가 직접 법원이나 검찰에서 발급받아 제출하는 방식이었는데, 지난달에서야 법원이나 검찰이 직권으로 증명서를 발급해 공탁소에 송부하도록 개선됐다.

항소심이 진행되던 지난해 지혜씨가 사는 곳과 수사·재판이 진행되던 검찰·법원은 고속열차로 2시간 거리였다. 사실 물리적 거리는 변호사의 차가운 답변에 비하면 별 문제도 아니었다. "그건 의견서를 제출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피해자는 결국 스스로 엄벌 탄원서를 써 냈다.

불법촬영 가해자 김모씨의 2심 판결문 내용 일부. 지혜씨 제공

불법촬영 가해자 김모씨의 2심 판결문 내용 일부. 지혜씨 제공

판결문도 지혜씨에게 상처가 됐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유년기에 다른 범죄 피해를 당한 경험으로 정서 불안과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정신적 고통이 오로지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라는 설명이었다. '고소가 늦어진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제출한 정신과 치료 기록은 외려 가해자를 돕는 무기가 돼버렸다.

재판 초기 변호사의 조력만 충실했다면 이 기록은 안 내도 됐다. 바쁜 변호사들 사정을 백 번 이해해보려 애써도 아쉬움이 쉬이 떠나지 않는 까닭이다. "제가 유별난 걸까요? 시 돌아간다면 사채를 써서라도 사선변호사를 선임했을 겁니다."


"6%뿐인 피해자 국선 전담변호사 늘려야"

최근 5년 피해자 국선변호사 운영 현황. 그래픽=김대훈 기자

최근 5년 피해자 국선변호사 운영 현황. 그래픽=김대훈 기자

통계는 지혜씨가 '유별난'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2021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220건의 피해자 국선변호사 이용자를 상대로 물어 보니, 약 44.5%(98건)가 불성실한 변호사를 만났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변호사 개인에게 돌리기도 어렵다. ①높은 비(非)전담 변호사 비율 ②미흡한 교육체계 ③부실한 처우 등 국선변호인이 피해자에게 집중할 수 없는 이유는 여럿이다. 이현주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심급별로 보수가 책정되는 피고인 국선(변호인)과는 달리 수행업무별 보수가 책정돼 일부 업무는 보수를 받지 못하는 구멍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기준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605명. 이 중 전임 변호사는 41명(6%)에 불과하다. 나머지 564명은 개인 수임 사건도 병행해 피해자에게 집중하기 쉽지 않다. 제도 도입 초기부터 피해자 국선변호 업무를 맡아 온 서혜진 변호사는 "피해자에게 '기업 업무만 해 봐서 잘 몰라요'라고 말하는 비전담 변호사도 있다"면서 "전담 변호사를 늘려 피해자 지원의 질을 높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무부는 2022년 7월부터 피해자 국선변호사 평가제도를 시행 중이다. 피해자를 조사할 때 변호를 성실히 했는지, 추가 조사나 공판 절차에 참여했는지 등을 따진다. 법무부 관계자는 "피해자 국선 전담의 보수를 피고인 국선 수준으로 인상하는 등 처우 개선을 위해 재정당국과 지속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강지수 기자
이근아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