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물론 일본과도 동떨어진 북태평양 해상에서 형성됐다가 소멸한 태풍 '므르복'이 알래스카에 거대한 침수 피해를 줬다. 동아시아에선 지난 15일 이미 온대 저기압으로 분류되면서 태풍으로 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세력을 유지하며 계속 북상해 베링해협 연안에서 '10년 만에 최악의 폭풍 재난'을 유발했다.
알래스카 주정부 등에 따르면 17일 므르복의 잔재가 베링해협 상공을 지나며 폭풍을 일으켜, 베링해협과 접한 서해안 도시 놈(Nome)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침수 피해가 발생했다. 마이크 던리비 주지사는 이날 므르복의 잔재인 폭풍을 "전례 없는" 폭풍으로 간주하며 재난 선포를 했다. 또 피해 지역의 구호에 나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사전 경고로 인해 저지대 주민들이 미리 대피하면서 인명 피해는 17일까지 보고되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서 침수 피해는 이어졌다. 이날 알래스카 교통공공시설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위터를 통해 지반이 뜯긴 집이 강 아래로 떠내려가다 다리에 걸려 둥둥 떠 있는 모습, 해안 도로가 침수된 모습 등을 사진으로 공개했다.
피해는 지난 15일부터 알래스카 지역에선 어느 정도 예견된 바였다. 알래스카 내륙 도시 페어뱅크스에 위치한 미국 국립기상청 지부가 "충격이 2011년 베링해 대폭풍을 상회하고, 몇몇 지역에선 최악의 해수면 범람을 경험할 수도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기상학자 에드 플럼은 17일 브리핑에서 "알래스카 해안 도시인 놈의 해수면이 1974년 이래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관측됐다"고 밝혔다.
통상 베링해협의 폭풍은 맹추위를 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 폭풍의 경우는 열대성 저기압인 '므르복'이 온대 저기압으로 변한 후에도 영향을 떨쳐 태평양의 북쪽 끝까지 폭풍을 일으킨 매우 특이한 사례다.
므르복이 온대 저기압으로 변한 15일 시점에 한국과 일본의 기상청,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는 추적을 종료했다. 즉 현재 므르복은 태풍이 아니다. 이후의 기상 움직임은 '전 태풍(former typhoon)' 혹은 '태풍의 잔재(remnants of typhoon)'로 부른다. 하지만 알래스카에선 이때부터가 경보의 시작이었다. 일부 지역에서 초속 22m(시속 80㎞) 수준의 바람을 일으키는 등 태풍급의 움직임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므르복의 북상으로 인한 이번 폭풍은 기후변화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다. 알래스카 중심 도시인 앵커리지의 기후학자 브라이언 브렛슈나이더는 뉴욕타임스에 "기후 변화가 폭풍의 규모를 이 정도로 키우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할 만한 강한 근거가 있다"면서 해수면 온도의 상승이 온대 저기압이 된 폭풍에 지속적인 힘을 가해 알래스카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앞서 한반도에 피해를 준 '힌남노' 역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나온 바 있다. 통상적인 태풍과는 달리 북위 25도 위쪽에서 발생한 후 끈질기게 버티면서 남하했고, 높은 해수면 온도로 힘을 유지하며 북상해 한반도 남부에 큰 피해를 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