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힘들고 기나긴 여정이라서 흔히들 마라톤에 빗대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마라톤 경주를 하는 선수들은 코스를 쉬지 않고 달린다. 우리네 인생은 그럴 수 없다. 여럿이 달려 승부를 겨루는 경주와 달리, 살면서 경쟁만 하는 것도 아니므로 누가 1등이라고 정할 수도 없다. 비유는 현상이나 사물의 단면을 두고 할 때가 많으니, 트집을 잡으려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저마다 코스가 있지만 결승점이 딱 정해지지는 않은 길을 홀로 달리는 마라톤쯤 될까? 제힘으로만 돌아가는 영구 기관은 존재할 수 없기에 밖에서 받는 힘도 적당히 있으면 좋다. 가족이나 친구도 그런 힘을 주는 요소일 것이다.
마라톤은 그냥 삶 전체보다는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인생 단계에 더 어울릴 법하다. 태어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죽을 때까지 달리려면 너무 벅차다. 20여 년은 준비운동을 하다가 30년 남짓 뛰고 그 다음에는 산보를 한다고 치면 얼추 들어맞는다. 영어 '커리어(career)'의 어원도 '길'이고 마찬가지로 '경력'을 일컫는 독일어 '라우프반(Laufbahn)'은 달리는 길(Lauf+Bahn)이다. 이제 스무남은 해를 달려온 나를 두고 자체 평가를 해 본다면 다행히도 그럭저럭 제 페이스대로 나아가는 중이다.
독일어 laufen[라우펜]은 '걷다/달리다' 둘 다 뜻한다. 처음에는 이게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컨대 한국어 '입다/신다/쓰다'가 모두 영어로는 wear이듯 언어마다 의미장이 다르다. 달리든 걷든 발을 움직여 나아가는 동작으로 보면 같다. 이 독일어 낱말은 영어 leap(껑충 뛰다)와 같은 어원이다. 즉 '뛰다→달리다→걷다'로 이어지는데 한국어 '뛰다'도 제자리에서 팔짝 뛰기 및 달리며 이동하기 둘 다 된다. 영어 spring처럼 원래 '팔짝 뛰다'였던 스웨덴어 springa[스프링아]는 이제 주로 '달리다'를 뜻한다.
물론 독일어도 달리다, 걷다, 거닐다 따위를 꼭 구별할 경우는 다른 낱말로도 나타낸다. 가만 보면 걷기와 달리기의 경계가 늘 명확하진 않으므로 laufen이 어울릴 때도 많다. 크로스컨트리(cross-country skiing)는 독일어로 Langlauf(멀리 걷기/달리기)인데 스키를 타고 내리막에서 활강할 때는 무척 빠르지만 눈이 많이 쌓였거나 오르막에서는 걷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의 메이요 클리닉에서는 이동 속도에 따라 천천히 걷기(시속 3㎞), 빠르게 걷기(6㎞), 가볍게 달리기(8㎞), 빨리 달리기(15㎞)로 나눈다. 나는 일주일에 적어도 사나흘 최소 한 시간씩은 시속 7㎞ 안팎으로 걷는다. 빠르게 걷기와 가볍게 달리기의 딱 중간이다. 달리기도 가끔은 섞는데 혼자 걸을 때는 웬만하면 이보다 더 느리게 가지는 않는다. 걷기도 되고 달리기도 되어 뜻이 어중간한 독일어 laufen이 나한테는 잘 맞는다.
다들 저마다 맞는 페이스(pace)가 있지만 남들과 보조를 맞춰야 할 때도 생긴다. 갈팡질팡하지 않으려면 신념(faith)에 따라 살아가되, 나만 따르라고 강요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모두 고유한 얼굴(face)이 있으나 때로는 체면도 차릴 줄 알아야 한다. 간혹 주춤하더라도 도약(leap)을 꿈꾸면서, 이 세 가지 '페이스'의 각기 다른 측면을 두루 살피며 인생길을 잘 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