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서 게릴라 출신 첫 좌파 대통령 탄생… 중남미 '핑크 타이드' 거세진다

입력
2022.06.2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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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 , 기업가 출신 경쟁자 꺾고 대통령 당선
연금 개혁, 부자 증세, 대학 무상 교육 등 공약
멕시코, 아르헨, 칠레, 페루 이어 좌파 정권 탄생

콜롬비아에서 사상 처음으로 진보 대통령이 탄생했다. 2000년대 초반 중남미를 휩쓴 ‘핑크 타이드(좌파 득세)’가 또다시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1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치러진 콜롬비아 대선에서 좌파 연합 ‘역사적 조약’ 구스타보 페트로(62) 후보가 득표율 50.5%를 기록하며 경쟁자인 기업가 출신 로돌포 에르난데스(77) 후보(득표율 47.3%)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두 후보 간 표차는 71만9,975표로, 박빙으로 예측됐던 여론조사와 달리 페트로 후보가 에르난데스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환경·인권운동가 프란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첫 흑인 여성 부통령 타이틀을 갖게 됐다.

페트로 당선인은 이반 두케 현 대통령의 뒤를 이어 8월 취임하게 된다. 핑크 타이드 때도 우파가 득세했던 콜롬비아에서 처음 탄생한 좌파 대통령이다. 페트로 당선인은 젊은 시절 좌익 민족주의 게릴라 단체 ‘M-19’에서 무장 투쟁을 벌였고, 정계 진출 이후 2012~2015년 수도 보고타 시장을 지냈다. 현재는 상원의원이다.

대권 도전은 이번이 세 번째로, 첫 도전이었던 2010년 대선에선 득표율 9%로 4위에 그쳤고, 2018년 대선에선 결선까지 올랐다. 당시 결선에선 두케 대통령에게 12%포인트 차이로 졌다. 세 번째 도전인 이번 대선에서는 연금 개혁, 대학 무상 교육, 석탄·석유산업 축소, 부자 증세 등을 약속하며 표심을 파고들었다. 콜롬비아는 40%에 달하는 빈곤율과 11% 안팎의 실업률, 강력 범죄 등에 시달리고 있어 어느 때보다 변화를 바라는 열망이 높았다.

‘콜롬비아의 트럼프’로 불린 에르난데스 후보는 부패 척결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1차 투표에서 깜짝 돌풍을 일으켰으나, 그 기세를 결선까지 이어가진 못했다. 아들이 연루된 회사에 이익을 몰아주기 위해 사업체 입찰에 개입했다는 의혹으로 조사도 받고 있다. 에르난데스 후보는 개표 결과가 나온 뒤 영상 성명에서 “이번 선거 결과를 받아들인다”면서 “페트로 당선인이 반부패 공약을 이뤄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콜롬비아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남미의 정치 지형은 확연히 왼쪽으로 기울게 됐다. 지난해 12월 칠레에서는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 35세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11월 온두라스에서도 좌파 후보 시오마라 카스트로가 승리해 12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뤘다. 그보다 앞선 6월 페루 대선에서는 빈농 가정 출신으로 2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페드로 카스티요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인 게이코 후지모리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2018년 멕시코, 2019년 파나마, 과테말라, 아르헨티나, 2020년 볼리비아에서도 줄줄이 좌파가 정권을 잡았다.

10월 대선을 앞둔 브라질에선 10여 년 만에 대권 재도전을 선언한 ‘좌파 대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룰라 전 대통령까지 승리할 경우, 사상 처음으로 중남미 주요 6개국(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페루) 모두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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