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귀환

입력
2021.08.18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봉오동 전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 뒤 벌어진 ‘독립전쟁 제1회전’이다. 임시정부는 일본군이 157명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홍범도 일지’엔 "일본군 오륙백 명이 죽었다"고 쓰여 있다. 더 큰 의미는 대한독립군과 대한군무도독부, 대한국민회의 삼단 연합으로 북로독군부가 결성되고 신민단 군대 등 북간도 지역 항일 무장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쳐 이룬 대승이란 사실이다. 신분과 지역, 이념과 종교를 넘어 하나가 되면 독자적인 힘으로도 일본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영웅 홍범도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잃어 머슴살이를 했다. 평민인 그를 ‘하늘을 나는 호랑이’ 의병장으로 만든 건 부인의 희생이 결정적이었다. 일본은 부인 단양 이씨를 붙잡아 남편의 귀순을 회유하는 글을 쓰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씨는 “계집이나 사나이나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라며 거부하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큰아들도 전투 중 숨졌다.

□ 홍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인연도 주목된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스스로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혔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한 나라의 장군으로 적장을 공격한 셈이다. 홍 장군과 ‘안 장군’이 연합작전을 폈을 가능성도 있다. 안 장군은 1908년 6월 동의회 의병부대 우영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펼 때 회령에서 홍 장군을 만났다는 진술을 남겼다.

□ 홍 장군은 카자흐스탄에서 서거한 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현충원에 18일 안장됐다. 효창공원에 마련된 안 장군의 가묘는 여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유해 송환보다 더 중요한 건 정신을 기리는 일이다. 두 장군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두 영웅이 바란 것도 완전히 독립된 조국이었다. 지금 우린 스스로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나라인가. 남북이 서로 갈라져 유해 쟁탈전까지 벌인 상황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 장군의 귀환은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마음 한편으론 장군을 뵙는 게 부끄러워지는 이유다.


박일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