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17일 한명숙 전 국무총리 모해위증교사 의혹 사건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함에 따라 이 사건은 새 국면을 맞게 됐다. 박 장관 지휘로 이르면 18일 개최될 대검 부장(검사장급) 회의에서 기존 무혐의 종결 결정이 뒤집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위증을 했다는 의혹을 받는 재소자가 공소시효 완료(3월 22일)를 앞두고 기소된다면, 위증을 교사했다고 지목된 검사도 재판에 넘겨질 가능성이 크다.
수사지휘를 내린 박범계 장관의 방점은 ‘합리적 의사 결정 절차’에 찍혀 있다. 대검이 한 전 총리 사건 핵심 증인이었던 재소자 김모씨의 위증 의혹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종결하면서 내세웠던 근거는 “대검 연구관 회의를 거쳐 내린 다수의 의사 결정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 장관은 동의하지 않았다. 이정수 법무부 검찰국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직접 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대검 연구관 회의를 거쳐 3월 5일 사건을 (무혐의로) 종결 처리했다”며 “대검이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특히 조사를 해왔던 한동수 대검 감찰부장과 임은정 검사가 최종 판단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두 사람이 참가한 상태에서, 대검 예규로 규정된 부장단 회의를 열어 범죄 혐의 성립 여부, 기소 가능성을 다시 따져 보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정수 국장은 “경륜을 갖춘 (검사장들의) 대검 부장 회의가 가장 의미 있는 협의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박 장관의 주문이 대검 부장단 진용을 염두에 둔 결정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종근 형사부장과 이정현 공공수사부장 등 친정부 성향 인사들이 다수 포진된 현실을 고려할 때, 한동수 감찰부장과 임은정 검사의 판단(김씨 기소)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검 부장 회의는 안건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경우, 출석 인원 과반수 찬성으로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에 “대검 부장들도 임 검사 뜻에 동조한다”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단 박 장관 지휘에 따라 대검에선 곧바로 부장단 회의가 소집될 것으로 보인다. 박 장관이 “3월 22일 공소시효 만료일까지 (재소자) 김씨에 대한 입건 및 기소 여부를 결정하라”고 지시한 만큼, 심의할 시간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태다.
만약 대검 부장들이 기존 무혐의 결론과는 달리, ‘김씨 기소가 타당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면 검찰 수사팀엔 불똥이 튈 공산이 크다. 모해위증 혐의로 김씨가 재판에 넘겨지면, 위증 교사 혐의를 받는 한 전 총리 사건 수사팀 검사들의 공소시효는 자동으로 정지된다. 한동수 부장과 임은정 검사의 ‘최종 타깃’인 검사들에 대한 정식 수사로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다.
물론, 대검 부장회의 결론에 구속력이 있진 않다. 최종 판단은 조남관 검찰총장 직무대행의 몫이다. 이정수 검찰국장도 “회의에 바탕해서 합리적 의사결정을 총장(대행)이 해 달라는 것”이라며 “어떤 결정이든 박 장관은 수용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조남관 총장대행에게 공이 넘어간 셈인데, 이미 무혐의 종결에 동의했던 그가 판단을 뒤집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게다가 대검 부장들이 기존과 같이 무혐의 종결에 합의하면 그만큼 부담도 줄어든다. 법무부 관계자는 “부장단 회의에서 기존 의견 그대로 나오면, 박 장관도 당연히 이를 수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장관으로선 ‘리스크’가 별로 없는 것이다.
검찰 내부에선 이날 박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에 대한 불만이 감지됐다. 여권의 ‘한명숙 구하기’에 박범계 장관이 화답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대검은 “공식 입장은 없다”며 침묵하고 있으나, 내심 불편한 모양새다. 검찰 관계자는 “대검에서 이미 결정한 사안을 다시 심의하라고 하면 누가 이해하겠느냐”면서도 “일단은 장관 지휘에 따라 절차를 밟아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당시 수사팀은 박 장관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수사팀 핵심 관계자는 "이미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까지 나온 사건인데, 이제 와서 법무부가 다시 문제 삼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수사팀 검사들 흠집내기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