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3일간의 기다림, 9명의 귀환… 숫자로 본 세월호

입력
2017.03.23 19:26


1073

침몰 1,073일 만에 마침내 세월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인 22일 오후 8시50분부터 본 인양을 시작한 지 7시간만이다.

해양수산부는 23일 “오전 3시45분 세월호 구조물의 일부가 수면 위에서 관측됐다”고 밝혔다. 구조물은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스태빌라이저와 선체 일부다.

세월호 선체는 오전 4시 47분 해저면에서 높이 약 22m까지 떠오르며 일부를 드러냈다. 3년여간 해저에 가라앉아 있던 탓에 전체적으로 녹 슬고 인양 작업 때문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416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가 이 날을 잊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비극 속에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를 기도하던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윤전추 청와대 행정관이 지난 1월 최순실 게이트 관련 2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다. “어떻게 그 날이 기억나지 않을 수 있냐”는 비판이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과 이들을 응원하는 국민들은 ‘416’이라는 숫자 아래 뭉쳤다. 성역 없는 수사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416가족협의회’는 참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서울 광화문 광장과 경기 안산, 팽목항과 동거차도 등에서 각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9

세월호 실종자를 찾기 위한 수색은 2014년 11월 11일에 끝났다. 295번째 사망자 황지현양의 시신이 발견된 지 약 2주 후였다.

당시 범정부사고대책본부장이었던 이주영 해양수산부장관은 209일간 이뤄진 수색을 마무리하며 “실종자를 발견할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현장 안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 잠수 수색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일주일 뒤인 18일 세월호 범정부사고대책본부가 공식 해체됐다.


126

세월호 참사 직후 정부합동 분향소 126곳이 마련됐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국민들의 애도와 추모의 장소인 세월호 분향소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부 극우단체의 공격 목표가 됐다.

1940년대 반공폭력조직을 재건하겠다며 나선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는 2014년 9월 서울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합동 분향소에 걸려있는 노란 리본을 철거하겠다고 나섰다가 제지를 당했다. 지난해 11월 경기 안산의 세월호 정부 합동분향소에 걸린 현수막 20여개도 공격을 받아 훼손되는 등 세월호 분향소는 잇따라 수난을 겪었다.


220만 4,224명

극우 세력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발길은 계속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 100일째를 맞은 2014년 7월 24일까지 집계된 합동분향소를 찾은 조문객 수는 모두 220만 4,224명이다. 여기 그치지 않고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이 결정된 지난 10일 많은 국민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다시 찾아 하루 종일 추모 행렬을 이어갔다.


154

세월호 참사 및 해운업계 비리 관련 혐의로 구속된 사람은 모두 154명이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버리고 탈출한 이준석 선장은 살인죄가 인정돼 2015년 11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김한식 대표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2015년 10월 징역 7년에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청해진해운의 실질적 소유자였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은 세월호 참사 3개월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장남 유대균 씨는 횡령 등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았고 장녀 유섬나씨는 현재 프랑스에서 송환 거부 소송을 벌이고 있다.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으나 퇴선 유도 등 구조 활동을 소홀하게 한 김경일 해경 123호 정장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2015년 11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7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처음 서면보고를 받은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부터 중앙재해대책본부를 방문한 오후 5시 10분까지 7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 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박 전 대통령 측은 헌재 변론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 오후 1시 7분과 1시13분경 ‘190명이 추가 구조돼 총 370명이 구조됐다’는 보고를 받아 상황이 종료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의문의 7시간을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하면서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7시간의 공백은 대통령이 생명권(헌법 제10조)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며 박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 사유 중 하나가 될 만큼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헌재는 “세월호 참사 당일 피청구인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는지 여부는 탄핵 심판 절차의 판단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탄핵사유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급박한 위험이 초래된 국가위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대응이 지나치게 불성실했다”고 지적했다.


9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고창석,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아직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세월호 실종자 9명이다. 수년간 유지된 ‘실종자’ 호칭에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가족들의 아픔이 배어 있다.

지금 이들은 시신이 수습되지 않았다는 뜻의 ‘미수습자’로 불린다. 이번 세월호 인양을 통해 이들 9명이 가족을 만나 미수습자 꼬리표를 떼어내고 안식에 들 차례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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