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 아주 자그마한 규모의 대학 하나가 문을 열었다. 이날 첫 입학식의 신입생은 고작 32명. 학생 수로 보면, 시골 어느 외진 마을 초등학교 분교 수준이다. 게다가 모든 수업을 온라인으로 하는 사이버대학이다. 그런데 교육계 안팎의 관심은 상당하다. 입학식에 축전 및 축사 영상을 보낸 이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다. 반기문, 한승수, 정운찬, 김황식, 정세균, 최태원, 이주호, 유홍림, 이광형 등등. 굳이 직함을 적지 않아도 알 만한 정∙재계와 교육계에서 내로라하는 거물급 인사들이다.
아직은 많이 낯선 이름의 태재대. 이 조그맣고 생소한 대학에 시선이 쏠리는 건, 200곳 가까운 그렇고 그런 기존 대학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완전히 다른 대학을 만들겠다고 호언하고 있어서다. 그들이 내세우는 경쟁 대학이 어디냐고? 하버드대, 스탠퍼드대다. 무모하다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곳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대학이 ‘전혀’ 아니다. 하나하나 새로움 일색이다. 뭔가 정말 대단한 파격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스멀스멀 생긴다. 9월 첫 학기 시작 후 3주 남짓 흐른 지난달 19일 학교를 찾았다.
태재대 본부가 자리 잡은 곳은 서울 종로구 원서동, 북촌한옥마을의 동북쪽 끝자락이다. 언덕길 골목을 한참 오르다 보면, 예사롭지 않은 외관의 건물과 마주한다. 서양식 글라스하우스와 층층이 쌓인 기와지붕의 누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건축가 고(故) 김석철이 동서양 건축 양식을 접목해 설계한 작품이란다. 태재(泰齋)란 이름도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는 ‘태(泰)'와 집을 뜻하는 ‘재(齋)'를 써 동서양을 잇는 인재를 키우는 터전이라는 의미로 지어졌다.
6층 건물 실내는 층층이 최첨단 교육시스템으로 채워져 있다. 교육 콘텐츠 제작을 위한 스튜디오, 화상 세미나를 위한 공간, 메타버스 캠퍼스가 시연되고 있는 로비, 각종 책과 논문 등을 찾아볼 수 있는 시스템…. 학생들이 생활하는 기숙사는 별도로 을지로에 마련돼 있다. 이 모든 게 30명 남짓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시설들이다.
원래 지원자는 국내외 410명이었다. 당초 밝혔던 정원 200명을 채우자면 채울 수 있었다. 보편적인 기준에서 보면 출중한 인재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원자 중 10%도 채 뽑지 않았다. “우리는 관습적 인재를 키우지 않는다” “우리는 정원을 채우는 대학이 아니다”라는 게 이 대학 염재호 총장의 말이다.
선발과정은 엄격했다. 서류심사에서 90명만 남겼고, 학생 5명씩 영어로 토론식 면접을 했다. 영어로 된 장문의 제시문을 읽고 40분간 열띤 논쟁을 했다. 면접관들은 녹화된 면접을 면밀히 분석했다. 심리학 전문가들이 만든 400문항의 인∙적성 평가와 개별 면접도 거쳤다. 특히 30%의 자기혁신인재 전형에서는 학교 성적보다는 성취 결과물을 주요하게 봤다. 뽑힌 학생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해외 명문대 대신 이곳을 선택했거나, SKY 대학을 다니다 옮겨왔거나, 초등학교 교사를 과감히 포기했거나, 해외에서 공부를 하다 검정고시로 다리를 놓았거나. 염 총장은 “국내에서 제대로 된 실험은 오직 태재대만이 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 좀 더 많은 학생을 뽑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학생 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원하는 인재상이 있죠. 앞으로도 그에 철저히 부합하는 친구들만 뽑을 거예요. 오직 절대적인 역량만 봅니다.”
- 선발된 신입생들은 실제 어떻던가요.
“입학사정에 참여했던 교수들이 너무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만족감을 표시했어요. 실제 오리엔테이션 등을 통해 만나보니 열정이 넘쳐나더군요.”
- 태재대의 인재상은 어떤 건가요.
“글로벌, 미래, 그리고 자기주도, 이 3가지예요. 국내에서 취업 잘하는 인재가 아니라 세계를 경영할 수 있는 인재, 과거 관습에 머무르지 않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인재,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거죠.”
- 자기혁신인재전형에서는 괴짜 스타일의 인재를 선호하는 건가요?
“괴짜라기보다는 뭔가 특정 분야에서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한 탁월한 결과물이 있는 친구들입니다. 수능으로 줄 세우는 일반 대학이었으면 아마 놓쳤을 수도 있을 거예요.”
태재대가 초기 벤치마킹한 곳 중 하나는 미국 미네르바대학이다. 벤처 기업가 벤 넬슨이 2014년 설립한 이 대학은 캠퍼스 없이 학생들이 세계 7개국을 순회하며 혁신 교육을 한다. 졸업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연간 200명의 학생을 모집하는데 2만여 명이 지원한다. 불과 10년 만의 놀라운 성장이다.
태재대 학생들 역시 4년 동안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세계 각국에서 공부하게 된다. 1학년 때는 전공 없이 기초 역량을 쌓는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수업은 온라인과 메타버스에서 듣는다. 비판적∙창의적 사고력, 소통과 공감 능력, 글로벌 능력 등을 키우는 과정이다. 2학년부터는 인문사회학부, 자연과학부, 데이터과학 및 인공지능학부, 비즈니스혁신학부 등의 전공을 택할 수 있다. 그리고 2학년 2학기부터는 해외 현장을 누비게 된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한 학기씩 머무른다. 사전에 모국어와 영어를 제외하고 2개 이상의 언어와 파이선 등 컴퓨터 언어를 익혀야 한다. 팍팍하긴 하겠지만, 매우 도전적이고 역동적인 4년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염 총장은 “대학이 어설프게 전공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탄탄한 기초 체력을 키우는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 미네르바대를 벤치마킹하고 계시는 거지요?
“아닙니다. 더 이상 미네르바대는 벤치마킹 대상이 아니에요. 이제 막 시작했지만 이미 한참 뛰어넘었다고 자신합니다. 지금은 ‘태재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 교육방식에서 기존 대학과 가장 큰 차이가 뭔가요.
“미래 인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초역량입니다. 대학에서 어쭙잖게 전공 공부를 해서 전문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입시 준비를 하는 고등학교에서도, 전공을 파고들어야 하는 대학원에서도 모두 할 수 없는 기초역량을 탄탄히 다지는 교육을 할 겁니다. 대학과 대학원은 철저히 분리돼야 합니다.”
- 그래도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지 않나요.
“4개 학부 중 하나를 택하긴 합니다. 하지만 일반대학과 달리 개개인이 스스로 설계하는 자기설계전공이 가능하고요, 복수전공도 용이합니다. 미국 프린스턴대 등 주요 대학들도 그렇게 해요. 사실상 전공 없이도 졸업이 가능한 구조라고 보면 되죠.”
- 미∙중∙일∙러 4개국을 택한 이유는요.
“이 나라들이 어떻게 강대국이 됐는지를 직접 현장에서 눈으로 보며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현지 코디네이터, 어시스턴트 등을 통해서 이들 국가의 역사∙문화적 현장을 직접 방문해보고 주요 의사결정의 배경과 과정 등을 짚어보는 시간들이 될 겁니다. 물론 900여 개 다양한 공간을 갖춘 메타버스 캠퍼스를 포스트로 해서 각종 소식과 정보, 자료들을 공유하고요. 수업도 온라인으로 계속 진행이 됩니다.” (만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어진다면 러시아는 구소련 국가 한 곳으로 대체하는 걸 검토 중이다.)
수업방식은 기존 온라인 강의를 생각하면 안 된다. 1기 신입생들이 현재 듣고 있는 1학년 과정을 보자. 최첨단 플랫폼(인게이지리)을 활용해 분 단위로 사전에 체계적으로 설계된다. 예를 들어 수업시작 5분 뒤엔 교수가 학생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다시 5분이 지나면 어떤 차트를 보여줘야 하고, 퀴즈는 언제 어떤 걸 내야 하고 식의 레슨 플랜이 촘촘하게 짜여있다. 수업시간에 특정 학생의 발언시간이나 질문 횟수 등은 데이터로 축적된다. 전문가들이 녹화된 수업을 일일이 살펴보고 학생 개개인에게 피드백을 제공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영어로 진행된다.
우선 탄탄한 교수진이 있어 가능하다. 미국 프린스턴대와 스탠퍼드대, 영국 케임브리지대 등에서 초빙된 교수들이 여럿 합류했다. 지금까지 16명이다. 학생 2명에 1명꼴이다. 교수진이 스스로 말하는 교수의 역할은 기존 대학과는 확실히 차별적이다. “과거처럼 기술이나 지식을 전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본인의 프로젝트를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을 돕는 조력자에 가깝다.”(곽지영 데이터과학 및 인공지능학부장) “일부 대학에서는 교육이 연구보다 후순위로 밀리지만 대학은 무엇보다 학생을 위한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스티브 저스티스 혁신기초학부 교수)
그렇다고 교수 개개인의 역량에만 기댈 수는 없다. 교육혁신원을 비롯해 글로벌선도원, 학생성공원 등 탄탄한 지원조직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일반 행정인력보다 지원조직 인력이 훨씬 많다. 염 총장은 “태재대의 새로운 교육방식의 힘은 지원조직에서 나온다”고 했다.
- 수업시간마다 시나리오가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을 만들 때 매 신마다 시나리오를 촘촘히 만들었다고 하지 않나요. 우리는 매 수업시간마다 시나리오가 있는 겁니다.”
- 간단한 작업이 아닐 텐데요. 시나리오는 누가 짜는 거지요?
“지원조직인 교육혁신원이 담당합니다. 액티브 러닝(Active Learning) 방식의 학습방법을 만들고 사후 모니터링을 통해 맞춤형 교육 방안을 제시하는 거죠. 계속 보완 수정해나갈 거예요.”
- 교수들이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요.
“올 3월부터 12주 동안 집중 트레이닝을 했어요. 100분짜리 프로그램을 매주 하나씩 수차례 연습하는 식이었죠.”
이렇게 육성된 학생들에겐 어떤 미래가 기다리는 걸까. 졸업과 동시에 허허벌판에 내던져지는 일반 대학과는 다를 것이라고 했다. 대학 측이 학생들의 졸업 후 진로까지 확실히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학교 측이 기대하는 진로는 국내에 머물기보다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는 것들이다. 세계 톱5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애플 구글 등 글로벌 기업에 취업하거나, 유엔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 가거나, 브루킹스연구소 등 글로벌 싱크탱크나 비정부기구(NGO)에 몸을 담거나. 학교 측이 적극적으로 문을 두드려도 주고, 필요하면 장학금이나 생활비도 최장 5년까지는 지원을 해줄 예정이다. 별도의 기금도 마련돼 있다.
- 태재대의 진가를 인정받으려면 졸업생의 진로와 평판이 매우 중요할 것 같은데요.
“맞아요. 해외에서 좋은 인재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죠. 태재대 졸업생은 확실히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 해요. 그래서 첫 졸업생이 나오는 4년 뒤에는 미국 대학 인증도 받을 계획입니다.”
- 국내에서는 극심한 의대 쏠림에 균열을 내야 우수인재를 영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의대 가는 학생들이 최고 엘리트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21세기 인재는 의대 지망생과는 길이 완전히 다르죠.”
- 대입 성적이 좋은 인재와 등치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소위 ‘SKY 대학’은 100% 능력의 인재가 들어와서 150%의 능력으로 졸업한다면 우리는 400%, 500%로 키워 내보낼 자신이 있습니다.”
- 사교육을 탈피하는데도 태재대가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벌써부터 컨설턴트들이 유튜브에 합격 전략에 대해 영상을 올린다고 하더라고요. 관심이 많은 건 감사해요. 하지만 우리는 쫓아오면 도망하고, 또 도망갈 겁니다. 부모들이 사교육의 마술피리를 따라가며 만든 학생이 아니라 정말 잠재력 넘치는 학생들을 뽑을 겁니다.”
태재대의 재원은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태재대 이사장)이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해 출연한 사재, 3,000억 원이다. 전임 대학 총장 10여 명이 모여 “우리 대학 이대로는 안 된다. 새로운 실험이 필요하다”고 모은 뜻이 결합됐다. 그 중차대한 임무를 고려대 총장을 지낸 염 총장에게 맡겼다.
염 총장은 방탄소년단(BTS)을 키워낸 방시혁, 영화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등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대학계의 BTS, 대학계의 기생충을 만들겠다는 포부일 것이다. 조 이사장이 염 총장에게 부여한 미션이 5년 안에 글로벌 인재들이 하버드, 스탠퍼드대 대신 태재대에 오도록 만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미션 수행이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가능해야 한다”고 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많이 버거울 수도 있고,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서로 힘을 북돋워가며 페달을 밟고 있는 듯했다. 최연소 신입생 전다희(15)양은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비인가 국제학교와 검정고시를 거쳐 태재대에 입학했다”며 “미 아이비리그 대학 진학을 꿈꾸다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도전에 동참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정서적, 심리적 지원을 해주는 학생성공원이 나이 어린 저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미국 명문 UC 샌디에이고 컴퓨터공학과 입학을 앞두고 태재대로 방향을 튼 최민우(19)군은 “지인들이 많이 불안해했지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어 태재대를 택했다”며 “학생 한 명 한 명이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있어서 함께 뭔가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거란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이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이다. 조금 더 공격적이어도 좋겠다 싶다. 조금 더 파격적이어도 괜찮겠다 싶다. 그래서 이들의 실험과 도전이 큰 족적을 남기길 많은 이들이 응원한다. 단순히 한 대학의 성공을 넘어, 박제된 한국 대학교육의 틀을 깨부숴줄 ‘메기’가 너무도 절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