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의 위기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동시다발적으로 악조건에 직면하고 있다. 러시아에 점령된 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대반격’ 작전은 3개월간 큰 진전이 없다. 게다가 약 2개월 후면 혹독한 추위가 시작된다. 겨울은 우크라이나의 공격 작전 수행에 특히 불리하다.
설상가상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던 서방도 점점 발을 빼려는 분위기다. 지난해보다 우호적인 시선도, 지원도 줄어든 게 사실이다. 국제사회를 향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호소에도 힘이 빠지고 있다.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CNN방송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이날 크림반도 세바스토폴 부근 러시아 흑해함대사령부를 미사일로 타격했다. 무인기(드론) 10여 대를 보내 공습을 가하기도 했다. 2014년 러시아에 강제 병합된 크림반도는 지난 6월 대반격 개시 이후, 바흐무트 등 남동부 전선과 함께 우크라이나군이 집중 공세를 퍼붓는 지역 중 한 곳이다.
그러나 영토 탈환의 성과는 크지 않다. 지난달 28일 우크라이나 남부 자포리자주(州) 로보티네를 탈환, 러시아의 1차 방어선을 처음으로 뚫긴 했지만 그뿐이다. 지금도 러시아군 병력과 지뢰밭에 막혀 하루에 10m 이하를 이동하는 게 고작이다. 진전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계절적 요인마저 조만간 발목을 잡게 됐다. 매년 10, 11월 우크라이나는 흑토 지대가 진흙으로 변한다. 전차 진격이 불가능해진다. 우기가 끝나면 곧바로 강추위가 시작된다. 마크 밀리 미국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지난 10일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기상 환경 악화 전까지 우크라이나군에 주어진 시간은 30일, 최대 45일 정도”라고 말했다. ‘긴급 상황’을 목전에 둔 셈이다.
우크라이나를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은 국제사회의 피로감이다. 교착 상태가 길어질수록 서방의 지원은 줄어들고, 휴전에 대한 압박만 커질 수밖에 없다. 이미 벌써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해 유엔총회에서 화상 연설을 했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올해엔 직접 참석해 19일 ‘더 많은 지원’을 호소했으나 전폭적 환영을 받진 못했다. 20일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에서도 그는 “러시아의 안보리 거부권을 박탈하고, 상임이사국 활동을 정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번 총회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공식 의제가 된 건 이때가 유일했다. 19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연설과 관련, NYT는 “작년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할애된 시간이 짧았다. 많은 비동맹 회원국들이 글로벌 의제로 다루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21일 워싱턴을 찾는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미국 의회도 무작정 환대를 하진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반격의 부진, 차기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언제까지 우크라이나에 무조건적 원조를 지속해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크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2월부터 총 400억 달러(약 53조 원) 이상을 지원했다.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등 공화당 인사들은 “우리가 들인 돈이 책임 있게 쓰였는지 물을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 여당인 민주당 일각에서도 전쟁 장기화에 부담을 느낀다고 WSJ는 전했다.
심지어 오랜 우방이었던 폴란드까지 등을 돌렸다. 러시아가 흑해 항로를 차단하자 우크라이나는 육로 수출이 가능한 폴란드 등에 농산물을 수출해 왔다. 하지만 폴란드가 자국 농민 보호를 위해 우크라이나 작물 수입을 금지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9일 유엔총회에서 “유럽 친구 중 일부는 러시아가 날개를 펼치도록 돕는다”며 폴란드를 저격했고,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20일 무기 지원을 끊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만 웃음을 짓는 형국이다. 지난 13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재래식 무기 지원을 약속받은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푸틴 대통령은 중국과도 더욱 밀착하고 있다. CNN은 “푸틴은 겨울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것으로 기대할 것”이라며 “앞으로 2개월 동안의 결과가 유럽 안보뿐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도 향후 10년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