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리(琉璃)는 교회나 왕족, 부유한 귀족들이나 쓸 수 있던 사치품이었다. 그나마 투명도나 표면의 매끈함이 지금 같지 않았다.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치장의 의미 못지않게 빛을 완벽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러 굴절시키기도 하는 유리의 결함을 가리려던 시도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더 투명하고 더 매끈하고 더 강한 유리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오늘날 건축자재로 널리 쓰이는 판유리를 낳은 원동력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유리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투명도와 강도, 경도, 적당한 면적의 유리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들이 잇따라 개발됐다. 판유리 대량 생산은 19세기 중엽부터 제한적으로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내구성은 떨어지고 값은 비싼, 사치스러운 건축자재였다.
대형 판유리 30만 장을 주철 골조로 엮어 세운 영국 ‘수정궁(1851년 완공)’의 위용에 전 세계가 눈부셔 한 사정이 그러했다. 런던 만국박람회장으로 쓰인 그 건물을 부러워한 이 가운데 통일 전 독일연방의 강자 바이에른의 국왕 막시밀리안 2세가 있었다. 그는 3년 뒤 독일 만국산업박람회를 위해 수정궁에 맞먹는 건축물을 짓게 했다. 건축가 아우구스트 폰 보이트가 설계하고 ‘MAN AG’ 사가 시공한 뮌헨 ‘유리궁전(Glaspalast)’이 그렇게 탄생했다. 수정궁과 거의 같은 공법으로 지어진 2층 철골조 유리궁전은 전면부 234m 폭 67m 높이 25m에 달했다.
하지만 박람회는 유럽을 강타한 콜레라 전염병 사태로 흥행에 실패했고, 유리궁전은 이후 몇 차례 산업 전시장으로 쓰이다 1858년 무렵부터 미술품 전시장으로 주로 활용됐다. 유리궁전은 1931년 6월 6일, 대규모 독일 낭만주의 작품전 도중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모은 대표작 3,000여 점과 함께 잿더미가 됐다. 원조인 수정궁이 전소되기 약 5년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