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추억의 영화를 다시 봤다. ‘예스 마담: 황가사저’(1985)였다. 지난 12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5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앞두고서였다. 량쯔충(楊紫瓊)이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이 점쳐지던 때, 그의 배우 초년 모습이 궁금했다.
‘예스 마담’이 1986년 국내 개봉했을 때만 해도 큰 충격이었다(물론 지금 봐도 놀라운 장면이 있다). 여성 액션물이 드물던 때였다. 청룽(成龍)으로 대표되는 홍콩 코믹 쿵후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쿵후 영화에서 여자배우는 주로 구조가 되는 대상이었지, 몸으로 누군가를 돕는 주체는 아니었다. 량쯔충이라는 신예 여자배우의 액션만으로도 신선했다.
‘예스 마담’을 다시 보며 예전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을 발견했다. 주인공 오낙천(량쯔충)은 탁월한 실력을 지닌 경찰팀장이다. 서장은 그의 노고를 칭찬하며 성희롱성 농담을 곧잘 한다. 오낙천이 맡은 수사를 돕기 위해 영국에서 여자 형사 캐리(신시아 로스록)가 홍콩에 온다. 영화 속 홍콩은 영국령이다. 캐리는 팀장인 오낙천의 지위를 무시한다. 자기 부하 부리듯 대한다. 오낙천 캐릭터는 여성에 대한 그릇된 당시의 인식과 식민지배의 그늘을 의도치 않게 반영한다. 오낙천은 괄시와 한계를 넘어 캐리와 사건을 해결한다. 배우 량쯔충의 성장사는 여자배우에 대한 편견, 아시아계 배우에 대한 얕잡아 봄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량쯔충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국 광둥성에 뿌리를 뒀다. 하지만 량쯔충은 중국과는 거의 무관한 유년기를 보냈다. 광둥어를 배우지도 않았다. 어려서부터 배우의 꿈을 키운 경우는 아니다. 4세 때 무용을 시작했고 영국으로 유학 가 왕립무용원에 진학했다. 척추를 다친 후 발레리나 꿈을 접었다. 딸이 말레이시아로 돌아오자 엄마는 미스 말레이시아 대회 출전을 종용했다. 량쯔충은 내키지 않았으나 엄마의 지청구가 듣기 싫어 대회에 참가했다. 결과는 1위였다. 호주 국제 미인대회에 참가했다가 청룽과 함께 명품시계 CF를 찍었다. 홍콩 신생 영화사 대표가 이 CF를 보고 영화 ‘범보’(1984) 출연 제안을 했다. 연기 인생의 시작이었다. 량쯔충의 배우 입문은 의지가 아닌 우연의 산물이었다.
1980년대 홍콩은 동양의 할리우드였다. 중국어권 재능들이 집결했다. 대만 배우 린칭샤(林靑霞)와 왕쭈셴(王祖賢) 등이 홍콩을 발판 삼아 아시아 시장으로 나아갔다. 홍콩이 영어가 통용되던 국제도시였다고 하나 중국어나 광둥어 구사 없이 영화계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웠다. 량쯔충이 데뷔했을 때 할 수 있었던 광둥어는 청룽 이름뿐이었다고 한다. 량쯔충은 광둥어를 배웠고 빠르게 적응해 갔다. 입문과 달리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은 강한 의지가 작용했다.
량쯔충의 무기는 발레였다. 무용으로 다진 운동신경이 액션 연기에 힘이 됐다. ‘폴리스 스토리3’(1992), ‘동방삼협’(1993), ‘영춘권’(1994) 등 출연 영화 대부분이 액션물이었고, 액션 연기를 주로 선보였다. 할리우드 진출작 ‘007 네버다이’(1997)도 다르지 않았다. 량쯔충은 제임스 본드와 농밀한 감정을 나누는 중국 첩보원을 연기했다. 이전 ‘본드걸’과는 확연히 달랐다. ‘와호장룡’(2000)은 그의 감정 연기와 액션이 조화롭게 섞인 영화다.
하지만 홍콩 액션 배우라는 이미지는 장벽이기도 했다. 량쯔충이 맡는 배역 대부분이 무술과 관련됐다. 나이가 들면 입지가 좁아지는 여자배우들 처지는 량쯔충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스카 여우주연상이 량쯔충만의 성취로 해석되지 않는 이유다.
량쯔충은 자신의 수상이 “모든 작은 소년, 소녀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의 신호등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소년과 소녀는 아시아계를 암시한 듯하다. 그는 “여성들(Ladies)이여 사람들이 당신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고도 했다. 여성들(특히 나이 있는)의 분투를 촉구하는 소감이었다. 38년 전 홍콩 영화와 여자배우에 대한 통념을 깼던 ‘예스 마담’의 투지는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