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실종, 법치의 오남용

입력
2022.09.13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선거 관련 고소·고발이 이토록 극심한 대선은 없었다. 김용민 평화나무 이사장이 “김건희 여사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다 읊어야 할 것”이라며 “(김 여사가) 구약을 다 외운다”고 했던 윤석열 대통령을 고발한다니 말 다했다. 야당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관련 해명이 허위사실 유포라며 윤 대통령을 고발했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백현동 개발사업 부지 용도변경이 “국토부 협박”이라는 발언 등으로 기소됐다. 검찰 통계도 실상을 보여준다. 20대 대선 선거사범 입건이 2,001건으로 19대(878명)의 두 배가 넘고, 기소율은 30.4%(19대 58.3%)로 절반이다. 흑색선전도 많았고 고발도 마구잡이라는 말이다.

□ 선거법 위반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일이라 신속히 수사해 위중하면 선출직을 박탈한다. 거짓말이나 금품 등으로 민의를 왜곡하면 선거를 다시 하자는 취지다. 그러나 재임 중 소추되지 않는 대통령을 고발하고, 대선에서 낙선한 야당 대표를 기소하는 건 의도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오히려 엄정한 수사가 이뤄져야 하는 쪽은 주가 조작이나 개발 의혹이라는 본질이다.

□ 문재인 전 대통령은 18대 대선에서 낙선한 뒤 국정원 댓글 선거개입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지고 국정원이 바로 서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면서도 “이제 와 선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순 없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중대한 범죄가 있었다 해도 기정사실이 된 선거결과를 뒤집는 것은 혼란이 너무 크다는 뜻이다. 미 대선에서 조지 W 부시와 경쟁했던 앨 고어가 법정 다툼을 포기한 것도 같은 이유다. 법에 기대 끝까지 가자고 했다면 나라가 쪼개지고 사법부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을 것이다.

□ 대선 후 지금까지 법치는 오남용되고 정치는 실종 상태다. 지난 대선이 어느 때보다 법적·도덕적 결함이 많은 후보들 간 경쟁이었다는 사실은 국민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하지만 유권자가 모르고 표를 던진 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치인들이 정치를 복구하고 다시 대화와 타협의 장을 열 때다.


김희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