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성 안 하면 죽는다" 에너지 줄이기에 목숨 건 글로벌 가전 기업들

입력
2022.09.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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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오프라인 관람객 받은 IFA, 성황리 폐막
유럽 기업들 친환경·에너지 절감 사례 적극 강조
기후변화·에너지 대란 겪으며 '지속가능성'이 화두
"국내 기업들도 실체 있는 ESG 활동 펼쳐야"


"지속가능성은 유행어가 아닙니다. 회사의 주요 관심사이자 생존에 필요한 가치입니다."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 IFA2022에서 만난 독일의 가전업체 보슈 관계자는 '지속가능성이 홍보 문구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진지한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보슈는 이번 IFA에서 세탁하지 않고 옷의 냄새를 제거하는 '프레시업'이란 전자 제품을 전시장 중앙에 세웠다. 세탁기 파는 회사가 이런 기기를 내놓은 이유를 묻자 그는 "아무리 에너지 절감을 한다 해도 빨래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설명했다.

가장 최근 일반 관람객을 불러 놓고 진행했던 2019년 IFA만 봐도 보슈는 인공지능(AI)을 접목해 더 똑똑해진 가전제품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보슈뿐 아니라 밀레, 지멘스 등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적 가전업체들은 당시엔 AI와 스마트홈 등 혁신 기술을 앞세웠다. 하지만 그사이 유럽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졌고, 올 초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으로 에너지 대란까지 겪으면서 유럽 소비자의 관심사가 달라졌다. 기업들도 제품 개발과 판매 전략을 거기에 맞춰 바꾼 것이다.



나무와 녹색 문구로 뒤덮인 IFA2022…에너지 등급 관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3년 만에 오프라인 행사로 열린 IFA2022가 6일 막을 내렸다. IFA2022에서 확인한 가전업계의 화두는 지속가능성이었다. 기업들은 전시장 곳곳에 풀과 나무를 배치하고, 제품 홍보 문구를 녹색으로 꾸미는 등 지속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적극 홍보했다.

특히 에너지 소비 등급 A를 받은 것을 훈장처럼 활용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3월 에너지에 민감한 유럽 소비자가 전기료와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더 엄격해진 에너지 등급 기준을 도입했다.

지멘스는 전시한 모든 제품에 에너지 등급을 적었다. 비록 제품이 B, C등급을 받았어도 그대로 표기했다. 고객에게 에너지 소비량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밀레는 제품의 소비 전력을 줄이는 것을 넘어 일상생활에서 사용자들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밀레가 새로 내놓은 냉장고는 식자재에 미세 분무를 뿌려 식품을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기능을 담았다. 해당 기능을 통해 고객이 음식물 쓰레기 배출을 최소화하는 것을 돕겠다는 것이다.



친환경 제품에 발길 집중…마케팅 '미끼'로 쓰이기도


친환경 제품에 참가자들의 발길이 집중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미국의 태양광 업체 잭커리는 IFA에서 간이 태양광 패널로 충전하는 고용량 휴대용 배터리를 소개했다. 잭커리는 전시장을 캠핑 공간으로 꾸미면서 캠핑에 관심이 많은 유럽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유럽 소비자들이 저전력·친환경 제품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를 마케팅 도구로 남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독일의 가전업체 그룬딕 전시장에는 곳곳에 '음식물 쓰레기와 싸우는 오븐' '음식물 쓰레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위한 냉장고' 등의 문구가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지 직원에게 물어보니 "음식을 최적의 온도에서 구워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어준다" "더 오래 음식을 보관할 수 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결국 에너지 감소를 위한 특별한 기술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삼성·LG도 적극…중국 기업 전시장에선 '지속가능성' 실종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 시장에서 활약하는 우리 기업들도 지속가능성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삼성전자는 미디어 컨퍼런스를 통해 버려진 어망 재활용 소재를 활용한 스마트폰 등 회사의 친환경 활동을 알렸으며, LG전자 역시 유럽 기준 연간소비전력량 A등급을 받은 기존 제품보다도 전력 소비량을 10% 줄인 '2도어 상냉장 하냉동 냉장고'를 선보였다.

반면 중국 기업들의 전시장에서는 지속가능성이란 키워드를 찾기 어려웠다. 하이얼과 TCL 전시장에서는 냉장고, 세탁기, TV 등 대부분 가전제품이 등장했지만, 주로 기술을 중심으로 홍보했다. 유럽 가전업체처럼 에너지 등급 표기도 없었다. 냉장고를 소개하는 하이얼 직원에게 제품의 에너지 등급을 물어보니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냉장고"라는 엉뚱한 대답만 했다.



국내선 여전히 구호에 그쳐…"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


아직까지 삼성전자나 LG전자처럼 전 세계 시장을 상대하는 기업이 아닌 경우 국내에서 지속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는 키워드로 여겨진다. 생산성이나 비용 효율성과 비교해 덜 중요한 가치로 평가받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너도나도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강조하자 겉으로 친환경적 이미지만 내세우는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들린다.

반면 IFA에서 확인했듯 주요국에선 지속가능성은 기업의 생존 전략으로 직결된 문제로 꼽히고 있다. 특히 주요국 소비자들은 지속가능성을 구현한 회사의 제품에 기꺼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독일가전통신전자협회(GFU)가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인도, 러시아의 소비자 2,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성능이 같다면 에너지 효율이 높은 제품에 최대 150유로를 더 지불할 용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흐름은 우리나라에서도 확산하고 있다. 지금은 MZ세대 중심으로 친환경에 관심을 보인다지만, 올여름 기록적 폭우와 같은 자연 재해는 앞으로 더 자주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유럽처럼 지속가능성이 사회의 화두로 꼽힐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IFA2022를 찾은 한 국내 기업인은 "기후변화에 더 민감한 유럽 기업들은 지속가능성을 두고 '안 하면 죽는다'는 말을 해 놀랐다"며 "실체가 있는 지속가능성 방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베를린= 안하늘 기자